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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난 돌아가신 할머니가
살아계셨을때 보다 더 생각난다
이별하시기전 엄마에게
‘모두 보고싶다’고 하셨던 말을
고통스럽게 되새기며
조금씩 부재에 대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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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금희 소설가
지난달에 할머니는 아흔두 살의 나이로 엄마 곁을 떠났다. 엄마 곁이라는 말을 내 곁이라고 하지 못하는 것은 할머니를 뵌 적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가족은 친지들이 사는 남쪽을 떠나 유일하게 인천에 자리잡았고 그 당시 그렇게 이주해온 젊은 세대들이 그렇듯 엄마는 고향에 자주 가지 못했다. 내가 외가에 간 것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나중에는 교통편도 나아지고 시간적인 여유도 생겼지만 어려서 가깝게 지내지 못한 친척들을 갑자기 어른이 되어서 살갑게 대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적어도 내게 친지란, 조부모란, 남쪽의 그 고향이란 실감보다는 어떤 개념에 가까웠던 게 사실이다.

할머니는 요양원을 떠나 평생을 지내셨던 고향 집으로 돌아왔다. 그 마을 선산에 할머니의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할머니는 일곱 남매를 키웠고 손자 손녀들의 몇도 그 손에서 자랐다. 사랑이 지극하셨던 분이라 그런 할머니를 기억하는 이들의 눈물이 그치지 않았다. 사실 나는 그렇게까지 슬픔에 집중하지는 못했다. 다만 엄마와 친척들의 애달픈 마음, 고통스러운 표정과 서로를 위로하는 손길들을 보며 내가 느낄 수도 있었던, 그러나 결국은 채 알지 못한 할머니의 사랑을 짐작할 뿐이었다.

장례를 치르는 동안 나는 다른 손주들과 달리 검은 평상복을 입고 있는 게 내내 마음에 걸렸다. 발인 날이 되어서야 장례에 합류했고 몇 시간 잠깐 입을 상복을 굳이 빌리지 말라는 어른들의 말에 따랐지만 나는 그것이 어떤 표식처럼 느껴졌다. 그러니까 멀다는, 할머니에게서 그렇게 멀리 있었던 혈육이라는 표식처럼 말이다.

장례가 끝나자마자 우리 가족은 다시 상경길에 올랐고 길은 멀었다. 이모들에게 우리는 이제 집에 돌아와 쉬고 있다, 라는 문자가 도착했을 때에도 우리는 도로를 여전히 달리고 있었다. 엄마는 엄마를 잃었지만 그렇게 울다가도 순식간에 엄마의 모습으로 돌아와 자식들이 피곤하지 않은지, 필요한 게 없는지를 살폈다. 엄마가 없는 동안 가게는 잘 돌아갔는지, 상을 치렀는데 지인의 잔치에 참석해도 되는지 챙기고 고민했다. 러시아워를 뚫고 겨우 인천으로 접어들었을 때 엄마는, 돌아가시기 며칠 전 할머니를 만난 이야기를 꺼냈다. 할머니는 나이가 많으셨지만 정신이 흐려지지는 않으셨고 당신 자식들을 모두 알아보았다. 이별이 멀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았던 엄마는 할머니에게 “누구 보고 싶은 사람 없어?” 물었다고 했다. 나는 그 답이 나 일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어떤 대답이든 그 거리감을 확인하는 것이리라 생각하면서도 “그게 누구였어?” 물었다. 엄마는 할머니가 “다 보고 싶다”라고 대답했다고 전해주었다. 다 보고 싶다, 문득 아득했다.

요즘 나는 할머니가 살아계셨을 때보다 더 자주 할머니를 생각한다. 원래 할머니는 내게 북쪽과 남쪽의 거리만큼 멀리 계셨던 분이므로 나는 그 부재에 대해 실감이 없고 그러니 마치 살아계신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 건 여전히 실제와 거리가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할머니를 기억하는 모든 이들에게 동일하게 찾아든 할머니의 부재, 그 속에서야 비로소 ‘나의 할머니’에 대해서 느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모두 다 보고 싶다는 할머니의 말, 그것에 대해 고통스럽게 환기하는 것을 시작으로, 조금씩 그리고 천천히.

/김금희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