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버마가 한때 아시아를 호령했던 축구 최강국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50대 이후 세대들이면 모를까 젊은 세대들은 웬 버마? 라고 할지도 모른다. 70년대 축구 해설로 국민을 들었다 놨다 했던 명 축구해설가 선영제는 한국 축구가 버마 앞에서 번번이 무릎을 꿇을 때 늘 이렇게 말했다. “버마 선수들 사복을 입었을 때는 잘 모르겠는데, 축구 유니폼만 입으면 저렇게 축구를 잘하고 예쁠 수가 없어요.” 축구 강국에 대한 경의였을 것이다.
우리에게 버마는 축구 때문에 기억되는 나라다. 70년대, 축구는 우리의 삶 전부였다. 말레이시아의 메르데카배, 태국의 킹스컵 대회, 인도네시아의 자카르타배가 열리면 우리는 열광했다. 축구 인기가 높자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박스컵이라는 대회를 만들었다. 1971년 제 1회 박스컵 대회 결승에서 우리는 버마를 만났다. 하지만 승부를 가리지 못하고 공동우승을 차지했다. 1972년 2회 박스컵에서 우리는 준결승에서 버마와 만났다. 결과는 1대 0 패배였고, 버마는 결승에서 인도네시아를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1973년의 3회 박스컵에서 버마는 준결승에서 또 우리를 1대 0으로 이기고 결승에서 크메르(현 캄보디아)와 무승부를 기록, 공동 우승을 차지했다.
그리고 4회 박스컵. 준결승에서 우리는 버마를 또 만났다. 하지만 상황이 바뀌었다. 그때 우리의 공격진은 차범근 박이천 이회택 김재한이었다. 기라성 같은 공격진의 덕택에 마침내 버마를 이겼다. 이듬해 결승에서 또 버마를 만났지만 승리했고, 그때 세대교체에 실패한 버마 축구팀의 모습은 그 후로 우리의 기억속에서 사라졌다. 몽에몽·몽몽틴·틴몽 버마 축구선수들의 이름은 지금도 50대 이후 세대에 영원히 기억되는 이름이다.
1989년 군부가 버마를 버리고 미얀마를 국명으로 사용했지만 여전히 우리에겐 버마가 더 친숙하다. 그 버마에 ‘민주화의 봄’이 찾아 왔다. 아웅산 수치 여사가 이끄는 민주주의민족동맹(NLD)이 압승해 53년 군부독재가 막을 내리고 민주화의 길로 들어서게 됐다. 외신은 버마라는 국명을 되찾을 것이라고 전하고 있다. 뒤늦게 민주화를 획득한 버마 국민과 민주화를 이끌어 온 아웅산 수치 여사에게 ‘축구 강국의 부활’을 기원하며 뜨거운 박수를 보낸다.
/이영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