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확량 따라 세금 일정량 매기는 ‘공법제도’ 고안
17년간 여론수렴·토론 실시 ‘과학적이고 치밀’
약자를 사랑하고 배려하려는 ‘열민지사’ 깊은 뜻

원경희 여주시장님1
원경희 여주시장
요즘 경제가 모든 문제를 앞선다. 오죽하면 미국 대통령선거에서 빌 클린턴이 ‘문제는 경제야 바보야’ 라는 경구로 상대방을 제압했던 일이 떠오를 정도다.

세종대왕의 재위 중에도 경제는 늘 어려운 문제였다. 즉위 초기에 세종대왕은 조세로 인한 고민이 많았다. 원인은 장기간 흉년 때문이었다. 세종대왕 역시 “나의 재위 20년 동안 풍년이 든 때가 한 해도 없었다”라고 회고할 정도였다. 당시 조선뿐만 아니라 동아시아가 기후로 인해 흉년이 들었던 것이다.

또 다른 이유는 잘못된 조세제도였다. 당시에 시행했던 ‘손실답험법’은 추수기에 관리들이 현장에 나가 실제 수확량을 헤아려 세금을 매기는 제도였다. 이 방식은 관리의 눈에 따라 세액의 높고 낮음을 결정했기 때문에 그 폐해가 많았다.

현장을 확인하는 관리들은 향응을 제공하는 곳은 세금을 적게 매겨 점점 세액이 낮아지면서 전체적으로 세금이 줄어들게 되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세종대왕께서 생각한 방법이 공법제도였다. 이는 평년의 수확량에 따라 일정량을 매기는 방식이었던 것이다.

1430년 세종대왕은 어전회의에서 대안인 공법을 의제로 부각 시키면서 전국적인 여론조사를 시작했다. 5개월간 관리부터 농민까지 17만여명에게 가부를 물었다. 또한 세종대왕은 이를 공론화함은 물론 과거시험 문제로 출제해 다양한 계층의 의견을 듣기도 했다.

결국 17년간의 긴 여론 수렴과 토론 끝에 전분연분법(田分年分法)이 탄생하게 됐다. 즉, 8도 토지에 차등을 두는 전분육등법(田分六等法)과 흉풍에 따라 9단계로 구분하는 연분구등법(年分九等法)을 병행하도록 했던 것이다.

세종대왕께서 시행한 개혁의 단계도 과학적이고 치밀하다. 먼저 전국적인 여론조사를 실시했고, 다음으로는 관료의 다양한 의견을 통해 시행착오를 줄여나갔다. 다음은 재상, 공신 등 고위관료들과 오랜 토론을 거쳐 당사자들이 수긍하는 상황에서 법을 시행했다. 이는 중앙집권적 양반관료제에서는 그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매우 혁명적인 일이었다.

늘어난 조세로 세종대왕은 집현전을 만들어 학자를 양성했고, 이들은 글자를 몰라 자신의 죄를 변호하지 못하는 백성들을 위해 한글을 만들었다. 농사에서 가장 중요한 비(雨)의 양을 계량하는 측우기, 해가 있는 날에 그림자를 이용한 해시계 등을 발명해 농업의 중흥을 이룩할 수 있었다.

이 같은 과정의 17년은 매우 긴 시간이다. 이는 문제 해결을 위한 설득과 검증의 기간이었다.

각계 각층이 모두 인정하는 해답은 결코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모두 공감하고 인정한다면 누구에게나 적용하는 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결론일 것이다.

시대의 비약적인 발전은 하나의 단순한 사실로 이룩되지 않는다. 무엇보다 개혁은 서로 자극하고 보완하며 시너지효과를 얻게 된다 할 것이다. 당시의 전체적인 발전은 후대의 모든 왕은 물론 현대에까지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과연 세종대왕의 궁극적인 지향점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약자를 사랑하고 배려하며 소통하는 마음으로 열민지사(悅民之事, 백성을 기쁘게 할 일을 궁리)를 했던 것이다.

/원경희 여주시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