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씨집안 혈육 지키기위해
목숨 바친 공손저구 역할 맡았던
인천시립극단 배우 ‘임홍식’ 영면
자신 연기분량 모두 소화하고
빛난 인상 준 고인의 명복을 빈다
진나라에는 두 사람의 대신이 있었다. 문신으로는 조순(趙盾)이었고 무신으로는 도안고(屠岸賈)였다. 도안고는 유능한 장군이었으나 음험한 위인으로 조순을 경계하였다. 조순이 공주를 며느리로 맞아 진영공과 사돈이 되자 도안고는 더욱 시기하였고 결국 음모를 꾸며 조순을 제거하였다. 공주와 결혼한 아들 조삭 또한 죽음을 맞이했고 조씨 집안은 모조리 도륙을 당하였다. 임신 중이던 공주는 냉궁에 갇혀 조씨 집안의 유일한 혈육을 출산하였다. 공주는 이 혈손을 지키고자 문객 정영을 불러 아이를 당부하고 자결하였고 냉궁을 지키던 장군 한궐도 아기를 내보내기 위해 자결하였으며 아기를 감추기 위해 은퇴한 대신 공손저구도 자결하였다. 정영은 자신의 아들과 고아를 바꿔 아들을 희생시키고 고아를 살려내었다. 그러나 아들을 잃은 정영의 아내는 절망하여 자결한다. 끝내 살아남은 고아는 정영의 아들로 자라며 아이러니하게도 도안고의 양아들이 되어 도안고에게 무술을 전수받는다. 성장한 고아는 자신의 내력을 알게 되자 도안고를 죽여 가문의 원수를 갚는다.
상식의 시선으로 보면 ‘복수’가 뭐라고 아기 하나 살리려 수많은 사람이 죽으며 심지어 자신의 자식까지 희생하나 비판할 수 있다. 물론 타당하다. 모든 생명의 본능은 자손을 낳아 후대를 잇는 것이다. 더욱이 아무것도 모르는 죄 없는 아기를 대신 죽게 하다니 ‘희생’을 미화할 수는 없다. 작품에서도 모든 사람이 고아를 위해 죽으나 정영의 아내는 자신의 자식을 위해 죽는다. 비극은 하나가 아닌 것이다. 이는 곧 희생의 정당성, 희생의 숭고함에 대해 품어야 할 당연한 의구심을 이 작품이 버리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사실 ‘희생’을 예찬하며 강요하는 데는 대체로 비인간적이고 사악한 저의가 숨어있다. 관객이 고아의 복수보다 죄 없이 희생된 아기와 아비 정영의 고뇌에 주목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드라마란 극단적인 상황을 배경으로 오늘의 문제를 질문하는 장르이다. 드라마에서처럼 목숨을 내놓지는 않더라도 만약 나에게 그런 일이 생긴다면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생각해보는 것이다. 즉 이 작품 ‘조씨고아’는 우리가 정영이라면 모든 것을 희생하여 지키고 싶은 것이 무엇이냐를 질문한다. 죽음을 각오하고 목숨을 버려서라도 지켜야 할 것, 나는 물론이고 내 자식까지도 동원해서 지키려는 것은 무엇인가.
옛날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충성심’이거나 ‘정절’이었다. 일제강점기에는 ‘독립’이고 ‘해방’이었다. 지금은 그것이 무엇일까? 이 사회에서 일관되게 가르쳐 온 것은 ‘민주주의’였다. 어려서는 이승복 어린이가 롤모델이었다. 공산당이 쳐들어오면 이승복 어린이처럼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소리쳐보리라 굳은 결심이 있었다. 자라서는 목이 타도록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쳤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민주주의를 위한 이들 행동은 ‘싫다’느니 ‘타도하라’느니 모두 부정과 반대에 기반하고 있었다. 공산당이 싫다고 외친다고 저절로 민주주의가 달성되는 것도 아니고 독재를 타도하고 호헌을 철폐한다고 곧 민주주의가 꽃피는 것도 아니다.
‘조씨’가 민주주의라면 ‘고아’는 민주주의를 위한 행동인데 복수를 마친 고아는 무엇을 했을까? 반대, 타도, 철폐 너머에 어떤 행동이 있을까? 어떤 행동으로 민주주의를 지켜갈 수 있을까? 아직도 민주주의는 우리에게 목숨을 바칠 만큼 중요한 가치일까? 지금 우리의 과제다. 이 작품에서 공손저구의 역할을 맡고 있던 배우 임홍식은 11월 19일 자신의 연기분량을 모두 소화한 뒤 무대 뒤에서 영면하였다. 임홍식은 인천시립극단의 배우였고 작은 배역에도 늘 빛나는 인상을 남겼었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윤진현 인문학연구실 오만가지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