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레 통행 못하는 오솔길 수준
화물은 사람이 짊어지고 운반
정조는 경제혁명 길 건설위해
‘패배와 가난의 길’을 없앴다
개척할 근거도, 해서도 안되는
‘삼남길 개발사업’ 중단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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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찬범 화성시문화재단 이사
10여년 전쯤, ‘산티아고 순례길’이 국내에 본격적으로 소개됐었다. 그 영향으로 제주도 올레길, 지리산 둘레길이 개발됐다. 영혼이 지친 현대인들은 자기 성찰의 길을 걷는 도보여행에 열광했다. 코오롱그룹은 조선시대 한양과 충청·전라·경상의 삼남지방을 잇던 ‘삼남길’을 개척하기 시작했다. 1천리에 달하는 국내 최장의 트레일 워킹 코스를 만들겠다는 야심이었다. 민심이 기대감에 부풀자, 경기도는 전담공무원까지 배치하며 전폭 지원했다. 하지만 실패했다.

조선시대에는 도로다운 도로가 없었다. 장거리는 굽이굽이 산을 넘고 물을 건너 통행했다. 오솔길 수준이었고, 홍수나 산사태가 나면 길은 바뀌었다. ‘삼남길’이 그랬다. 당연히 수레는 통행하지 못했다. 화물은 말 잔등에 싣거나, 사람이 짊어지고 운반했다. 결과적으로 바퀴가 없는 잉카 문명의 교통과 운송이 다르지 않았다.

도로가 사라진 이유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당한 후 도로개설을 기피했기 때문이다. 도로망이 잘 정비되어 있으면, 외적이 신속하게 쳐들어온다는 것이 이유였다. 산성으로 달아날 시간을 벌기 위해서는 도로가 열악해야만 했다. 도로가 없는 편이 전쟁 피해를 최소화시킨다고 믿었다. 숙종의 ‘치도병가지대기治道兵家之大忌(도로를 건설하거나 보수하는 것을 금함)’라는 말은 조선 중·후기의 국방전략과 도로정책을 잘 대변하고 있다. ‘삼남길’의 숨은 비밀이다.

조선인 뇌리 속에서 사라졌던 도로가 다시 살아났다. 청나라의 선진문물을 견학한 홍대용·박제가·박지원·홍양호 등과 같은 북학파들은 낙후된 조선의 경제를 개혁·개발하기 위해서는 수레를 상용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도로개설이 절실하다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조선은 도로를 닦지 않았다. 산이 많다거나, 공사가 어렵다는 것은 부수적인 문제였다. 근본적인 문제는 정국을 주도하고 있는 수구세력들의 반대였다.

정조는 결단을 내렸다. 도로혁명은 현륭원 이장사업(1789년)과 함께 은밀하게 시작됐다. 한양에서 옛 수원부 읍치(융·건릉 주변)까지 가는 길은 팔달산 서로(삼남길, 현재 서부우회도로 노선에 가깝다)였다. 이장 시 거리는 ‘삼남길’이 훨씬 가까웠지만, 정조는 새로 건설한 팔달산 동로(구 1번국도 노선에 가깝다)를 이용한다. 운구행렬은 이장지에서 남쪽으로 5리 떨어진 세람교(細藍橋·한신대학교 앞)까지 내려갔다, 다시 북으로 올라왔다. 팔달산 서로보다 10리를 더 돈 셈이다. 정조에게 ‘삼남길’은 도로가 아니었다.

화성신도시를 건설하면서, 도로의 진행방향을 우선시하여 화성행궁의 좌향을 남향을 포기하고, 동향으로 했다. 행궁 앞에는 상업로인 십자가로를 만들고 ▲십자가로에서 동장대 북쪽까지 ▲십자가로에서 장안문까지 ▲장안문에서 영화정까지 신작로를 개설했다. 도시계획도로였다.

도로혁명의 진수는 시흥대로였다. 1794년(정조18) 4월, 정조는 을묘원행을 준비하며 건설했다. 거리는 남태령을 넘는 기존의 ‘삼남길’인 과천로와 비슷했으나 지세가 평평하고 넓었다. 수레운행에 대비한 도로였다. 도로 폭은 10m 정도로 수레와 사람이 자유롭게 교차 통행할 수 있었다. 1번 국도의 모체였다.

그렇게 정조는 경제혁명의 길을 건설하기 위해, 패배와 가난의 ‘삼남길’을 현역에서 은퇴시켰다. 길은 학교가 되고, 농경지가 되고, 주택이 되고, 공장 등으로 변했다. 가는 실선에서 희미한 점선으로 흔적만 남았다. 오늘날 소개되고 있는 ‘삼남길’은 옛사람이 걷던 길이 아닌, 추측으로 지명과 지명을 연결한 선에 지나지 않는다.

오늘도 많은 도보 여행자들은 교통사고에 무방비로 노출된 채 ‘물 위를 걷는 것’처럼 길 없는 길 ‘삼남길’을 걷고 있다. 이제 ‘삼남길’사업은 중단되어야 한다. 개척할 근거도, 개척이 될 수도, 개척이 되어서도 안 되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차라리 정조의 경제혁명 의지가 배어있는 서울 노량진에서 화성시 융·건릉까지 걷는 것이 바람직하다.

/주찬범 화성시문화재단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