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회의원이 시인이 되는건
전혀 이상하지 않지만
시집을 내고 국회사무실에서
판매했다는 사실에 ‘씁쓸’
시인으로서 자존감 있었더라면
그렇게 팔지는 않았을 것이다

옛날 정치가들은 말과 글에 능숙했다. 그것은 그들이 관리나 정치가가 되기 위해 많은 책을 섭렵하고 글쓰기 훈련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말과 글은 논리가 분명하고 문학적 향기가 있었다. 그들은 나라에 위급한 사태가 발생하거나 임금의 잘못을 지적할 때 정연한 논리와 세련된 수사(修辭)로 자신의 생각을 전했다. 그들은 죽음을 앞두고도 천연스레 시를 주고 받았는데, 이방원의 ‘하여가’와 정몽주의 ‘단심가’는 서로 다른 정치적 입장과 세계관을 시적 형식으로 주고받은 가장 아름답고 기품 있는 사례다. 조선조의 관리나 정치인이 결정적 상황에 처했을 때 자신의 심경을 시(한시, 시조)로 읊은 예는 이루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이며, 그것들은 한결같이 그윽한 문학적 향훈을 간직하어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된다.
현대사회에서는 더 이상 정치인에게서 아름답고 기품 있는 말과 글을 기대하기 어려워졌다. 그들은 자극적이고 선동적이며 심지어 선정적인 말을 쏟아 붓는 데는 나름대로 일가견이 있는 것 같지만 고상하고 깊이 있는 말과 글로 대중을 감동시키는 일에는 능력도 관심도 없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은 학창시절 경전을 읽고 아름다운 문장을 쓰는 교육을 거의 받지 못했고, 정치인이 되어서도 전문가가 써 준 글을 읽는 일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현대사회에 이르러 시와 정치가 분리된 것은, 모든 것이 분업화된 사회 특성상 자연스러운 일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지금 국가의 고급 관리나 정치인을 선발하는 데 옛날식의 과거제를 활용하자는 것도 아니다. 모든 것이 극도로 세분화된 현대사회에서는 제 능력과 분수에 맞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근대 이후 세상물정 모르는 시인이 정치적 상황에 말려들어 망신을 당한 예는 비일비재하다. 그와 반대로 첨예한 정치적 국면에서 날카롭고 격조 있는 말과 글로써 독재와 불의에 저항한 시인도 적지 않다. 시가 정치에 종속되면 시와 시인 모두 추레하고 비굴해지지만 정치를 초월해 진실을 지향하면 시와 시인이 함께 고상해지고 격이 높아진다.
현금 우리나라는 가히 ‘문인공화국’이라 해도 크게 잘못된 말이 아닐 정도로 시인, 수필가가 넘쳐난다. 정확한 통계는 확인하지 못했으나 어떤 절차나 방식으로든 ‘등단’이란 과정을 거쳐 ‘시인’으로 행세하는 이가 수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그런 형편이니 시인이 국회의원이 되는 건 다소 격에 맞지 않아 보여도 국회의원이 시인이 되는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국회의원이 시집을 내고 그것을 국회의원 사무실에서 판매했다는 언론 보도는 ‘막장드라마’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아 입맛이 쓰다. 그에게 최소한의 시인으로서의 자존감이 있었더라면 자기 시집을 그렇게 팔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시집 몇 권을 팔아 약간의 금전적 수입은 얻었을지 몰라도, 시인의 얼굴에는 먹칠을 하고 말았다. 그에게 시인으로서의 정신적 존엄이 애초부터 있었는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이 모든 게 말하기, 글쓰기 교육을 제대로 시키지 않은 나 같은 문학선생의 잘못인 것처럼 생각되어 부끄럽기만 하다.
/장영우 동국대 문창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