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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忙을 본다는 것은/ 망亡을 보는 것이다.

나의 온갖 부끄러운 행동들이 모두
조급하게 서두르는 것은
망亡을 보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산을 오르다 만난 박새둥지에서
털도 나지 않은 망亡을 보았다.
망보기가 떠난 곳은 망忙이 뚫린 곳이다.
허술하게 썩어가는 둥지 안이
나의 이곳 저 곳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들었다.

박무웅(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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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성훈 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
하나의 단어가 많은 의미를 생산해 내는 시 일수록 시적인 가치를 지닌다. 시는 일반적인 것에서 시작되지만 언어화되면서 다의적인 의미로 발전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복잡한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상적 언어’로서는 존재 의미를 타진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망’은 빠르다는 뜻 ‘망忙’과, 소멸한다는 뜻 ‘망亡’으로 읽을 수 있다. 그래서 “망忙을 본다는 것”과 “망亡을 보는 것”은 ‘망’이라는 동일한 단어이지만 분명한 차이로 나타난다. 망은 빠르게 가는 것과 소멸해 가는 것을 동시에 보는 것이다. “조급하게 서두르는 것”도 소멸해 가는 “나의 온갖 부끄러운 행동들”에서 유례된다. 나를 응시하는 일이야 말로 ‘허술하게 썩어가는 박새 둥지 안’에 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다. 이곳은 “망보기가 떠난 곳”이면서 “망忙이 뚫린 곳”으로서 “나의 이곳 저 곳일지도 모른다는” 죽음 앞에선 인간의 불안하고 연약한 존재적 해석에 도달하고 있다.

/ 권성훈 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