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성(詩聖) 이백은 공자의 수제자인 안회(顔回)가 밥을 짓던 중에 티끌이 묻은 밥이 아까워서 먹다가 동료들에게 의심을 받았던 고사와 현인으로 일컬어졌던 윤길보의 아들 백기가 계모의 옷에 붙은 독벌을 떼어 내려다가 참소를 받은 고사를 소재로, “티끌이 묻은 밥을 걷어 내고 독벌을 떼어 내려고 하였건만, 사람들은 성인을 의심하고 현인을 시기했네.(拾塵철蜂 疑聖猜賢)”라는 시구를 지었다. 그는 이를 통해 청주를 성인으로, 탁주를 현인으로 표현했다.
물론 이러한 중국 고사는 자연스럽게 우리나라에도 전해졌는데, 당대 지식인이었던 목은 이색에 의해 전파된 듯하다. 조선 초기 청주, 즉 소주는 특정계급인 양반들에게만 접근 가능한 기호품이었고, 사치스런 고급주로 인식됐다. 그 이유는 곡식을 발효시켜 증류하기 위해서는 많은 양의 곡식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정에서는 곡식 낭비를 이유로 소주를 금지하자는 간언이 있기도 했다.
조선 성종 대 조효동은 “세종 대에는 사대부들이 집에서 소주를 드물게 썼는데, 지금 연회에서 모두 쓰므로 낭비가 심하니 금지하자”고 국왕에게 요청했고, 실제로 성종은 이를 받아들였다. 또한 소주는 너무 많이 마시면 중독이 되어 얼굴이 파랗게 되고 말을 못하는 구금증이 나타나고 혼미하여 의식을 잃게 되기도 하는 폐단이 있기도 했다.
이처럼 소주는 독하기도 하여 건강에 폐단을 주기도 하였지만 양반사대부가를 중심으로 빚어지고 사용되었기에 조선의 백성들은 주로 탁주를 즐겨마셨다. 탁주는 백성의 술로, 거르지도 짜지도 않고 그대로 마시는 술이다. 그래서 조선시대 문인 정희량은 이를 ‘혼돈주(渾沌酒)’라고 불렀다.
내 막걸리 내 마시고 我飮我濁, 내 천성을 내 보전하네 我全我天, 내가 스승 삼는 술은 我逎師酒, 성인도 아니고, 현인도 아니네 非聖非賢
정희량은 비운의 인물이었다. 그는 백성들의 지지를 받았지만 조정의 관료들과 기득권층은 그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무오사화’로 인해 김해로 유배간 뒤 집으로 돌아왔다 어느 날 산책 간다고 하고는 사라져 신선으로 화했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그가 세상을 한탄하며 탁주인 막걸리를 혼돈주라 이름 한 것은 어쩌면 백성들의 한(恨)이 그 술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는 “사람이 누가 나의 이 술을 즐기는 뜻을 알 것인가”라며 혼돈주를 마셨다. 백성들과 함께 하던 정희량이 마셨던 혼돈주, 즉 탁주는 백성들의 술이기도 했다. 그래서 조선시대 그 숱한 금주령 시대에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
벌써 한해가 저물고 있다. 특히 올해는 나랏일 때문에 술 마실 일이 많았다. 지금도 이런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혼돈스런 세상에 혼돈주를 마시다가 한 해가 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혼돈주가 비록 혼돈스러운 것 같지만 술한잔으로 혼돈스러운 세상을 마감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지고도 있다. 그래서 혼돈주는 혁명의 술이기도 하다. 하여 혼돈주는 위대하다. 이 어지러운 세상, 오늘 밤에도 목놓아 외치겠다. 혼돈주를 위하여!
/김준혁 한신대 정조교양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