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에 빠진 여자 구조 예법 떠나
권도의 상황윤리인 동양과 달리
이슬람율법엔 융통성도 없는데
사우디에서 여성이 첫 당선 ‘충격’
올해엔 폐쇄적 이슬람사회에도
남녀평등 보편적 가치 확산되길


김덕균
김덕균 성산효대학원대학교 효문화학과 교수
과거 전통사회에서는 남편과 아내의 역할과 기능이 달랐다. 맹자가 다섯 가지 윤리를 구별하며 부부유별(夫婦有別)을 말한 것도 이 때문이다. 주역에서는 남자와 여자의 다름을 말하며 하늘과 땅을 비유로 들었다. 하늘에서는 햇빛과 단비를 내리고, 땅은 이를 받아 만물을 생장시킨다. 하늘이 남자가 되고, 땅이 여자가 되는 까닭이다. 이때 높고 낮음은 의미가 없다. 그저 하는 일이 다를 뿐이다.

남경여직(男耕女織)이란 말도 마찬가지다. 농경사회에서 남자는 밖에 나가 밭을 갈고, 여자는 안에서 옷감을 짜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남녀 간 노동의 장점을 활용한 절묘한 역할 분담이다. 안 일 바깥일에 대한 구별은 농경사회의 특성상 그저 남자와 여자의 기능상 유리함을 활용한 것일 뿐, 거기에 어떠한 차별도 우열도 있을 수 없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이것은 남녀유별의 정도를 지나쳐 남녀 차별의 논리로 둔갑했다. 역할과 기능의 차이를 무시하고 상하고저의 신분차별로 남자와 여자를 구별하며, 남녀유별(男女有別)의 ‘별’은 차별의 논리가 되었다. 일곱 살부터 남녀가 함께할 수 없다는 ‘남녀칠세부동석’ 이야기도 여성의 행동만을 제약하는 쪽으로 나아가 차별윤리가 되었고, 또 그것을 예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환경에서 남녀가 서로 바라보는 것은 당연히 금기사항이었고, 손을 잡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오죽하면 양반가에선 안방과 사랑방, 생활터전까지도 구별했을까. 어느 대가집은 안방과 사랑방 사이를 담으로 막았고, 출입하는 대문도 구별해 놓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절 태어난 아이들이 그리도 많았던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표면적인 접촉 불가의 원칙과 이면적인 자유로운 만남 속의 애정행각이 달랐음을 보여준다.

아무튼 남녀간 자유로운 만남이 불가능했던 사회 속에서 접촉이 가능했던 경우를 맹자는 말한다. 길 가던 남자가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여인을 보았다면 구해줘야 하는지 아니면 방치해야 하는지에 대한 대답에서다. 물에 빠진 여인을 구하기 위해서는 손을 잡아야 한다. 하지만 당시 예법은 남녀 간 보는 것도 비례(非禮)인데 하물며 손을 잡는 것은 얼마나 큰 결례인가.

맹자의 대답이 걸작이다. 여자의 손을 잡지 않는 것은 예법이고, 물에 빠진 여자의 손을 잡아 끌어줌은 권도(權道)라는 것이다. 이때 ‘권’은 권세, 권력이 아니라 경중을 헤아리는 저울, 저울추를 말한다. 결국 권도란 상황에 맞는 도리로서의 상황윤리이다. 그때그때 상황을 저울질하여 도리에 맞도록 하는 것이 권도다. 아무리 정해진 예법이라도 상황에 따라서 그 예법이 달라질 수 있음을 말한다.

동양의 갑갑했던 전통 예법에서도 이렇듯 정해진 도리 이외의 응용윤리가 있었는데, 아직도 폐쇄적인 예법에 얽매여 벗어나지 못하는 사회가 있다. 일부 이슬람국가를 말한다. 십여 년전 사우디아라비아 메카의 어느 여학교 기숙사에서 불이 났을 때 대피할 여유가 있었음에도 15명의 여학생이 목숨을 잃었다. 베일을 쓰지 않은 여자는 밖으로 나올 수 없다는 이슬람 율법이 아까운 여학생들을 희생자로 만든 것이다. 불이 활활 타고 있음에도 소방대원들은 여학생들을 구조하지 못했다. “낯선 남자가 여자 몸에 손을 대서는 안 된다”는 그들만의 예법이 구조를 막았기 때문이다.

물에 빠진 여성을 구제하는 것은 예법을 떠나 권도의 상황윤리로 가능하다고 했던 동양과는 달리 이슬람 율법에는 이런 융통성도 응용윤리도 없다. 그런 이슬람사회에 지난해 작은 서광이 비쳤다. 사우디아라비아 여성들이 처음으로 후보자를 내고 투표도 했다. 여성 당선자도 나왔다. 일부 갑갑했던 이슬람사회가 이를 계기로 달라지길 기대해 본다. 다른 폐쇄적 이슬람사회에도 파급되어 남녀평등이라는 인간의 보편적 가치가 확장되었으면 한다.

/김덕균 성산효대학원대학교 효문화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