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주는 전쟁을 틈타 소작인을 더욱 착취하여 이익을 추구한다. 귀족은 자신의 특권만 보장해준다면 적군에게 협조하고 자국민을 보호하지 않는다. 마을 사람들은 점령군 본부에 밀고장을 써서 서로를 고발한다. 밀고장 처리가 주 임무인 브루노는 루실에게 밀고장을 보여준다. 그중에는 ‘공산주의자’를 고발하는 것도 있었다. 아니, 반세기전 프랑스에서도 ‘빨갱이’라는 공격이 자행되었다니, 이게 무슨 일일까? 역사적 내력은 이렇다. 1918년, 1차대전 종전 후 프랑스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국가에 기여한 바에 대한 보상을 받고자 했다. 특히 그들은 전쟁기간 동안 국가 전쟁 물자를 수주하여 성장한 재벌들에 비판적이었다. 이는 적극적인 노동 운동으로 이어졌다. 그중 기념비적 성취는 1936년 6월의 총파업이다. 이로 인해 평균 10% 임금 인상, 주당 40시간 노동제, 노사분쟁 중재와 조정을 위한 기구 설치, 모든 노동자에게 2주간 유급 휴가 부여를 주 내용으로 담은 역사적인 ‘마티뇽 협약’이 체결된다. 프랑스 기업가들은 반동 운동에 나섰다. 대혁명 시기의 망명 귀족들처럼. 그들은 좌익 세력 척결을 외치고, 공산주의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독일 나치스의 파시스트 운동을 찬양하기까지 했다. 1939년, 2차 대전이 발발했다. 독일은 북부 프랑스를 점령하고 남부 프랑스에 비시 괴뢰 정부를 세웠다. 이때부터 1945년 종전까지 프랑스에서 가장 비애국적이었던 집단은 기업가들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독일에 협력하고 그동안 눈엣가시였던 노동운동 참여자들 명단을 나치에 넘겼다. 영화 속 밀고장처럼.
영화는 이렇게 전쟁 이전부터 존재했던 프랑스 내부의 모순과 계급 갈등을 고발한다. 즉, 독일군이 점령하기 훨씬 이전부터 프랑스는 전쟁 상태였던 것이다. 단지 전쟁은 그동안 몰랐던 인간과 집단의 본성을 드러내 주었을 뿐. “인간의 본성을 보려면 전쟁을 하면 된다”는 영화 초반부의 대사처럼 말이다. 이 모든 전쟁을 관찰하며 루실은 각성, 성장한다. 지주인 시어머니의 만행을 목격하고 독일군에게 쫓기는 소작인을 숨겨준다. 브루노와의 사랑의 한계도 깨닫는다. 영화 마지막에서 루실은 레지스탕스에 참여하러 파리로 떠난다. 이제 루실은 알아 버린 것이다. 인간의 본성을. 아아, 영화 속 루실만 그러랴. 우리 역시 올 한 해, 너무도 깊이 인간과 집단의 본성을, 한 국가 내부의 전쟁을 봐 버린 것을.
/박신영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