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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얀이 20세기 후반기를 장악한 명 지휘자라면 토스카니니는 20세기 전반기를 살다간 거장이었다. 카라얀 하면 떠오르는 것이 '베를린 필'이라면 'NBC 심포니'는 토스카니니와 최후까지 함께 한 최고의 교향악단이었다. 카라얀이 타고난 천재였다면, 토스카니니는 노력으로 위대함에 이른 장인이었다. 토스카니니는 모든 곡을 암보해서 지휘했다. 그렇지 않고는 지휘할 수 없었다. 지독한 근시로 악보를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31세였던 1898년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가진 43번의 연주회를 모두 외워서 지휘해 단원을 놀라게 했다. 덕분에 라 스칼라 오페라 극장에 전격 기용됐다. 생전에 160곡을 외웠다. 그는 악보에 충실한 원칙주의자였다.

그는 80이 넘어서도 아파트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89세로 눈을 감을 때까지 하루에 고작 3~4시간밖에 자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패기와 노력이 그의 재능을 꽃피우게 했고, 그를 위대한 거장(巨匠)으로 승화시켰다. 파르마 출신인 토스카니니는 이탈리아의 자랑이었다. 그가 사망했을 때 밀라노의 신문팔이 소년들은 "토스카니니가 죽었다"고 외치지 않고 "마에스트로가 사망했다"고 외쳤다. 밀라노 시민들은 '마에스트로'가 '토스카니니'임을 알아차리고 일제히 묵념을 올렸다.

토스카니니 사후 이탈리아에서 토스카니니의 후예라는 많은 지휘자가 출현했다. 빅토르 데 사바타,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 클라우디오 아바도, 리카르도 무티, 리카르도 샤이, 주세페 시노폴리가 계승자를 자처하지만, 음악평론가 볼프강 슈라이버는 "두 사람은 공통적으로 1856년 나폴리에서 출생한 작곡가 마르투치 음악을 지지했다"며 무티가 후계자에 가장 가깝다고 주장했다. "진지한 음악가로 인정받고 싶은 자는 작품의 원본에 몰두해야 한다"고 늘 주장하는 무티는 생전에 토스카니니가 그랬던 것처럼 연주자에게 악보에 충실할 것과 생생하게 표현할 것을 요구했다.

현재 시카고 심포니오케스트라 음악감독으로 생존하는 최고의 지휘자 반열에 서 있는 무티가 오는 5월 경기문화의 전당 초청으로 수원을 방문해 지휘, 성악, 오페라코치를 위한 '경기 리카르도 무티 아카데미'를 갖는다는 소식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경기필하모닉오케스트라와 5월 27·29일 두 차례 공연도 예정돼 있다. 벌써부터 토스카니니의 후계자 무티를 만날 5월이 기다려진다.

/이영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