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기관, 1997년 외환위기 직후부터 서민상대 돈놀이
대출로 집 장만 할부로 차 사고 생활비는 신용카드로…
결국 고용불안·민간소비 위축 '빚에 눌린 경제' 만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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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구 수원대 교수·객원논설위원
경제성장률과 소비지출이 증가한 이유는 노동의 대가로 얻은 가처분소득이 늘어난 결과가 아니라 각종 개인채무가 증가한 때문이다. '마케팅의 대부'로 불리는 미국 노스웨스턴대학 필립 코틀러 교수의 미국경제에 대한 진단이다.

1970년까지 미국인들의 신용대출은 전무했으나 2012년에는 가계부채가 11조1천300달러로 불어났다. 부동산 담보대출이 전체의 70%인 7조8천100달러이고 학자금대출 9천905달러(8.9%), 신용카드 8천498달러(7.6%) 등이다. 가처분소득 대비 가계부채비율은 1980년 68%에서 2014년에는 113%로 증가했다. 미국의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지속적으로 증가했으나 중산층 대부분이 카드론으로 가계수지 결손을 충당한 때문이다. 미국인 67%가 신용카드를 소지하고 있으며 2014년 미국가정의 평균 신용카드 대출액은 1만5천607달러로 평균임금의 40%에 달한다.

톱니효과라는 게 있다. 소득이 높아지면 소비수준도 동반 상승하는 반면에 소득이 줄 때는 소비의 동시축소가 어려워 경기하강 속도를 늦추는 것을 의미한다. 비올 때를 위해 준비한 우산이 빛을 발할 상황이나 미국인들의 저축률은 실망 그 자체이다. 2012년도 국별 가계저축률은 중국 50%, 프랑스 16.1%, 독일 11%이나 미국은 4%에 불과하다. 1인당 GDP가 미국보다 높은 노르웨이도 8.1%이다. 미국인 중 20%는 아예 한 푼도 저축하지 않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절대 다수 미국인들이 '꿈질'을 할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금융기관들의 파행적 돈놀이가 화근이다. 담보 없이도 대출이 가능한 신용카드가 단연 인기였다. 심지어 대출 무자격자들에게도 모기지론을 권했다. 신용평가기관들의 '귀에 걸면 귀고리'식 평가는 주마가편이었다. 자유를 빌미로 브레이크 밟기를 주저한 규제기관의 무책임은 도를 넘었다. '가계부채가 2008년 서브프라임 위기의 진원지였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는 이유이다. 향후 10년 동안 미국정부가 갚아야할 이자액만 무려 5조 달러에 이른다. 은행의 개인 상대 이자놀이에 국가경제가 거덜 난 것이다. 그럼에도 서민들은 여전히 신용카드를 긁어대고 있다. 부가가치의 대부분이 은행으로 빨려 들어갈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한국은 미국보다 더 심하다. 2014년 GDP대비 가계부채비율은 163%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1개국 중 최고치를 기록했다. 신용카드 보유율은 89%로 세계 1위이다. 월평균 가계소득은 2005년 289만원에서 2014년에는 430만원으로 10년 만에 48.7% 증가했으나 같은 기간 지출은 41.9% 증가하는 데 그쳤다. 소득이 증가하면 소비성향은 낮아지고 저축성향은 커지는 법이나 작금의 개인저축률은 5%를 겨우 넘어섰다. 단기간의 가계부채 급증이 원인으로 추정된다. 가처분소득 대비 가계부채비율의 경우 미국은 34년 만에 45% 증가했으나 한국은 불과 10년 만에 34%나 늘었다. 금융비용 누증(累增) 탓에 소비를 줄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한국 금융기관들이 개인상대 돈놀이에 팔을 걷어붙인 것은 1997년 외환위기 직후부터였다. 당시 GDP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110조원의 공적자금 덕분에 기사회생한 시중은행들이 기업금융보다 리스크가 훨씬 적은 소매금융에 올인 한 것이다. 사람들은 대출받아 집을 사고 할부금융을 이용해 마이카를 장만했으며 일상의 생활비는 신용카드를 긁어 벌충했다. 2003년 카드대란이 상징적이다. 이명박정부 이후 가계부채는 눈덩이처럼 커졌다. 모기지론, 카드론, 할부금융 등은 고용불안과 함께 민간소비 위축의 일등공신이다. 한국경제도 미국처럼 빚이 떠받치고 있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기업을 위한 신용시스템에서 출발한 자본주의가 이제는 가계소비를 위한 대출시스템으로 전락했으며 금융자본은 다른 경제분야에서 쥐어짜 낸 돈으로 혼자 잘 먹고 잘 사는 산업으로 둔갑했다. 돈 먹는 괴물의 식탐 한계가 가늠되지 않는다. 지금은 고인(故人)이 된 미국 MIT대학의 찰스 킨들버거 교수의 "경제적 재앙 전에는 거의 대부분 가계부채가 급격하게 늘어난다"는 경고가 귓전을 맴돈다.

/이한구 수원대 교수·객원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