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조판서 한응인 활약 왜군 격퇴 앞장
명 "우린 순망치한 관계" 친밀함 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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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시 사사동에 있는 한응인 묘. /원일중 제공
중국에서는 임진왜란을 '만력(萬曆)의 역(逆)'이라 부릅니다. 임진왜란 당시 신종(神宗)이라는 황제의 연호가 만력(萬曆)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명나라는 내란이 일어나 어수선한 분위기였습니다. 중국의 서쪽 국경 지대인 닝샤(寧夏)에서 반란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명나라가 조선을 도와주는 것은 조선에 대한 일종의 의무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명나라는 내란으로 군대를 즉각 파견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죠. 또한, 선조의 망명을 받아들이기도 어려웠습니다. 만일 받아들인다면 방어가 취약한 요동지방으로 일본군이 전면적으로 침입해 올 것이기 때문이죠.

그렇다고 전통적 우호 관계 차원에서 볼 때 명나라가 조선을 내버려두기는 어려웠습니다. 오랜 세월 우호 관계를 맺어온 조선이 어려움에 처했는데 모른 체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의견이 많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임진왜란 초기 조선의 저항이 너무 보잘것없었기 때문에 명나라는 조선이 일본과 동맹을 맺은 것으로 의심했습니다. 그래서 이후에 명나라는 관리를 파견해 사실을 확인하고 나서야 군대를 파병하게 됩니다. 이렇게 임진왜란 초기에 조선의 대응도 미흡했고, 명나라의 도움도 늦어 온 나라가 전쟁의 참혹함과 공포에 치를 떨어야 했으며 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쳤습니다.

이러한 위기에 일본의 도요토미(豊臣秀吉)가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조선에 길을 빌려 달라고 했던 사실을 알리고 조선과 일본이 동맹을 맺은 것이 아님을 알려 명나라가 조선에 품었던 의심을 풀게 한 인물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한응인(韓應寅)입니다.

그는 1584년 종계변무주청사(宗系辯誣奏請使)의 서장관(誓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온 경험이 있었고 1591년 예조판서에 승진해 진주사(陳奏使)로 다시 명나라에 갔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돌아오는 길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게 됐습니다.

그는 개성에서 피난길에 오른 선조를 만나 제도도순찰사로 임진강에서 방어하기도 했지만, 왕을 호위해 의주의 행재소(行在所)에서 공조판서에 임명된 뒤 요동(遼東)에 건너가 원병(援兵)의 급속한 출병을 요구하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그해 12월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이 원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자 중국어에 능숙한 그가 접반관(接伴官)으로 이여송을 맞았습니다. 그 후 1599년 사은사(謝恩使)로 다시 명나라에 가 정유재란 때의 원군에 대해 사례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명나라 요양(遼陽)의 부총병(副總兵) 쭈청순(祖承訓)은 "우리는 조그만 이웃 나라를 반드시 도울 것이다. 중국과 조선은 입술과 이처럼 친밀한(脣亡齒寒)관계"라고 말하며 조정을 안심시켰다고 합니다. 과연 당시의 조선과 명이 그처럼 친밀한 관계였을까요? 아니면 조선은 그저 이(명나라)를 보호하는 입술(조선)에 불과했을까요?

한응인은 당시 조선이 처한 상황을 바로 보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상황이 내부적으로나 국제적으로나 어려운 현실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국가가 어려울 때 어떻게 해야 할지는 선조들의 삶을 통해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신대광 원일중 수석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