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무역보험공사 경기북부지사장 오주현
오주현 한국무역보험공사 경기북부지사장
EBS '녹색동물(총3부작)'은 꽤 잘 만들어진 자연다큐이다. 식물은 움직이지 않는다는 일반상식과 달리 번식을 위해 모감주는 보트 모양의 씨방으로 중국에서 무려 3천㎞ 이상 바다를 항해한 후 우리나라에 닿아 꽃을 피운다고 한다. 어떤 식물은 화재가 나도 600℃ 이상의 고온을 견디어 새싹을 틔우고, 또 어떤 식물은 교묘한 방법으로 곤충을 유인해 꽃가루를 퍼뜨리고 번식한다고 한다. 생태계 최말단의 식물이지만 생존본능만큼은 어느 고등동물에 뒤지지 않는다.

반면, 공룡이나 맘모스 같은 일부 거대동물은 급격한 환경변화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해 멸종하였다. 크다고 생존력이 더 높은 건 아니다. 과연 호모 사피엔스는 얼마나 존속할 수 있을까? 이들이 만들어 내고 있는 기업들의 운명은?

최근 대외경제 여건은 공룡을 멸망케 했던 환경변화 못지않은 충격을 주고 있다. 원자재 가격 하락, 신흥국 경제불안, 중국 성장률 둔화 등으로 우리 수출이 급락세를 보이고 있고, 이런 추이가 장기화될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과연 우리의 공룡(대기업)들이 버티어 낼 수 있을까? 기형적으로 공룡에 의존하는 우리경제가 위태롭기만 하다.

한때 팬택은 우리나라 휴대폰 시장에서 LG전자보다 높은 시장점유율을 차지하며 두각을 나타냈었다. 최소한 삼성과 LG와 함께 3강 구도를 지속할 것으로 기대되었다. 그러나 팬택은 대기업의 장벽을 넘지 못하고 무너졌다. 한국에서는 중소기업이 대기업 주도 업종에서 살아남기가 하늘의 별따기 만큼이나 어렵다.

시선을 중국으로 돌려보자. 설립한지 얼마 안되는 신생기업 샤오미는 눈부신 성장세를 구가하며 단숨에 중국 휴대폰 시장에서 상위권 다툼을 하고 있다. 샤오미(小米)는 좁쌀 죽을 먹으면서도 미래를 꿈꾸며 지어낸 이름이라고 한다. 이제 샤오미의 사업은 휴대폰, TV, 보조배터리, 스쿠터 등 전방위적으로 확대되고 있다. 알리바바도 마윈 회장의 창의적인 아이디어에서 출발했다.

어찌하여 한국에서는 중소중견기업이 자생하지 못하고 또 대기업으로 커가지 못하는 것일까?

국내 대기업의 1차 협력사인 A사는 뛰어난 기술력에도 불구하고 지난해 겨우 중소기업 평균수준의 영업이익률을 기록했다. 원래는 꽤나 수익성이 좋은 아이템이었지만 재무제표상의 높은 수익에 대해서는 대기업이 빛보다 빠른 속도로 납품단가조정을 했기 때문이다. 이러다 보니 박한 마진 때문에 의미 있는 기술개발에 나서지 못하게 되었고, 점점 해외경쟁사와의 기술격차가 줄어들고 있는 상황이다.

큰 나무가 빛을 차단하면 작은 식물이 살 수가 없다. 우리의 고약한 산업생태계 때문에 대다수 중소기업들은 빛 대신 빚으로 연명해야 하는 처지다.

사자는 풀을 뜯지 않는다. 초원이 사라지고 나면 초식동물도 사자도 호랑이도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최상위 포식자 대기업은 건강한 산업생태계가 유지될 수 있도록 중소기업을 보호하고 또 그 고유영역을 침범하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중소기업, 중견기업, 대기업이 황금비율을 이루어 공존할 수 있을 때 산업생태계는 건강하게 유지될 수 있다.

중소기업 스스로도 동식물의 놀라운 생존본능처럼 어떠한 환경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경쟁력을 갖추어야 한다. 단순히 대기업의 기존사업모델을 따라서 하거나 양적성장에 치중하기보다는, 창의적인 아이디어와 경쟁력 있는 기술력, 유연하고 신속한 의사결정, 온갖 역경을 극복할 수 있는 용기와 열정으로 전력을 다해야 한다.

작은 기업을 서구에서는 'SMEs(Small & Medium Sized Enterprises)'라 하는데, 우리는 반대로 소(小)보다 중(中)을 우선하여 '중소기업'으로 칭한다. 우리에겐 큰 것이 중요하고, 작은 것의 희생은 부득이 하다고 여겨진다. 이제는 우리의 인식이 바뀌어야 한다. 작은 것을 소중히 여기고, '중소(中小)기업'을 '소중(所重)기업' 대우해야 한다.

좁쌀 같은 중소기업들이 글로벌 기업으로 무럭 무럭 성장해 나가기를 기대해 본다.

/오주현 한국무역보험공사 경기북부지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