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함경도에서 태어난 시인이자 나병(癩病) 환자이며 나병 퇴치 운동가인 한하운은 1950년 한센병(문둥병) 환자 수백 명과 함께 부평공동묘지 인근으로 이주, 성계원이란 나환자요양소를 만들며 인천과 인연을 맺었다. 성계원 자치회장, 대한한센총연맹 위원장으로 활동하며 나병 퇴치 및 구제 운동에 앞장섰다. 성계원은 이후 국립부평(나)병원으로 바뀌었고, 소록도에 국립나병원이 신설되면서 폐지됐다.
성계원의 흔적은 청천농장, 경인농장 등의 명칭으로 부평에 남아 있다. 현재도 중앙에선 한하운 시인을 기념하기 위한 '한하운 기념사업회'가 활동하고 있으며, '한하운 문학상'이 수여되고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 부평엔 한하운의 시비(詩碑) 하나 세워져 있지 않아 민선 부평구청장으로서 책임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의 대표 시비는 전라도 소록도에 있다. 그가 경기도청 공무원으로 근무했던 인연으로 잠시 머무른 수원시 세류3동 수원천 변에도 지난 2011년에 시비가 만들어졌다. 이 시비를 만든 '세류3동 좋은마을만들기협의회'는 "수원천 변에서 머물다간 시인을 영원히 기억하기 위하여 '보리피리' 시비를 세운다"고 적어 놓았다.
한하운이 인천에서 산 25년에 비하면 수원 거주 1년은 말 그대로 머물다간 정도다. 그럼에도 부평엔 그의 흔적이 크게 남아 있지 않다. 여러 이유가 있겠으나 한하운의 글에 그 답 하나가 담겨 있다.
"우선 부평은 이 지방민의 반대가 없을 것이라 믿고 불모의 산협이지만 우리가 무슨 선택의 자유가 있을까… 우리들의 마지막 안식처로서 택하기로 하였다." (한하운 자작시 해설집 '황토길' 중)
문둥병 환자를 이끌고 갑자기 인천을 찾아왔으니 달갑지 않았을 것이고, 나병은 무조건 전염된다는 인식이 있었기에 시인 한하운을 기억하기보다 문둥이 한하운을 지우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가 '驪歌'(여가)에서 노래했듯 "님 오시면 피어라 진달래꽃/寒食(한식)에 素服(소복)이 통곡할 때에//富平(부평) 성계원에 진달래 피면/이 세상 울고 온 문둥이는 목쉬어."처럼 우리가 한하운 시인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싶어 했던 것은 아닌지 자성해 본다.
하지만 한하운은 '한하운 시선'에 수록된 친필 유고 '부평 지역 청년단체연합회에 부친다'에서 "부평 평야는 우리의 넓은 마음으로/높솟은 계양산은 우리의 이상으로 하늘에 닿고/한강이 銀龍(은룡)으로 굽이치고/강화, 영종섬이/관악산이 남한산이 북한산 산들이/부평을 품안고//선인들의 옛 읍터가/한촌 어느 변두리처럼/부평이 어찌 인천의 변두리인가?//"라며 부평에 무궁한 애정을 보내며 인천사람으로 살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었다.
한하운은 1959년 나병 음성 판정을 받고 사회로 복귀했고 1975년 나병이 아닌 간경화증으로 사망했다. 그러나 죽어서 인천에 묻히지 못하고 경기도 김포공원묘지에 유택을 마련, 우리 기억에서 사라져 가고 있다. 인천시가 2014년 인천의 인물로 선정했다고 하나 아직 기념물 하나 세워져 있지 않으니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한하운 시인이 돌아가신 지 40년을 맞아 뒤늦게나마 그를 위한 詩碑라도 하나 세워, 한 작가의 작품 세계와 나병 퇴치 운동의 역사를 기억해 줄 것을 지역 사회에 제안한다. 부평구도 노력을 아끼지 않겠지만 관(官) 주도가 아니라 지역 문화예술인들과 주민들이 앞장서 인천의 인물을 재조명하는 기회를 마련해 주길 기대해 본다.
/홍미영 인천시 부평구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