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대학살의 신' 네 인물처럼
화해보다 분란 야기하는 행동통해
분쟁이 어떻게 성장하는지 보자
한걸음 떨어져서 스크린속 일처럼
우리 자신의 일을 생각하다 보면
생각지도 못한 진실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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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진현 인문학연구실 오만가지 대표
일각에서 북한의 도발이 계속되고 있는데도 젊은 세대는 무덤덤하다고 걱정인 듯하다. 그러나 북한의 도발에 무덤덤한 것이 젊은 세대뿐일까? 북한의 도발은 늘 특정한 시기에는 있어왔으니 이번이라고 예외일 리 없다. 그보다 현실에서 통일시계는 거꾸로 가지 않는다는 말이 더 이상 긍정될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 더 가슴 아픈 일이다. 더욱이 전쟁은 이미 현재형이다. 당장 오늘, 당장 이번 달, 당장 올해의 생존을 걱정하는 '전쟁 같은 노동'이 지금 이곳의 문제이다. 더욱이 언제 우리의 삶이 안전하기나 했던가. 건물이나 다리가 무너지는 일도 있었고 자동차는 물론이요 전철, 지하철, 선박도 맘 편히 타고 다니는 것이 아니다. 그냥 필요하니까 목숨 걸고 타고 다니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걱정해야 하는 것은 이러한 상시 전시 상태에서 치솟는 아드레날린, 치솟는 전투지수가 아닐까 싶다. 소소한 일에도 큰소리가 나고 다툼이 발생하는 것은 아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배려나 온화한 태도, 너그러운 이해 따위는 일상에서 사라진 것이 아닐까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행복한 사람은 마음이 너그럽다. 한걸음 물러서서 보면 저것이 뭐 싸울 일인가 싶은 일로 싸우는 사람이 많다면 단지 사람이 이상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세상이 사람들을 불행하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럴 때는 세상을 바꾸는 것, 시스템을 바꾸려는 노력이 우선이다. 그러나 시류에 휩쓸리지 않도록 자신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다. 이는 각자 몫이다. 시스템이 안전하지 못하면 스스로 조심하는 수밖에 없으니 솟구친 아드레날린이 부질없이 자신과 가족, 이웃을 해치지 못하도록 삼가면서 동시에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이때 한 걸음 물러나 분쟁이 어떻게 진행되는가를 살필 수 있다면 유용할 것이다.

영화 '대학살의 신 Le Dieu du Carnge(The od of Carnage)'은 그 참고서이다. 야스미나 레자(Yasmina Reza)의 희곡을 영화화한 것인데 아동성추행으로 수배된 폴란스키 감독이 30년 만에 체포되어 연금되어 있을 때 작업한 작품이다. 폴란스키 감독의 역량이나 스타일보다는 원작의 문제의식과 극적 성격 자체가 뛰어난 작품이라 감독의 기분 나쁜 이력은 조금 비켜놓아도 괜찮다. 게다가 조디 포스터, 케이트 윈슬렛 등 등장하는 유명 배우의 열연도 굉장하다. 본래는 연극으로 영국 웨스트엔드, 미국 브로드웨이 등지에서 대단한 평가를 받으며 공연되고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도 2010년, 2012년 공연되어 호평을 받았었다. 영화에서도 공간적 배경은 거의 집안을 벗어나지 않아서 연극처럼 볼 수 있다.

총칼도 대량살상도 등장하지 않으니 '대학살'이라는 살벌한 제목은 얼핏 부합하지 않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이 작품의 본질은 '전쟁'이다. 우리 안에 살아있는 소위 '올 킬(all kill)'의 본능을 형상화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는 두 부부, 네 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이들은 다투다가 이빨이 부러지고 부러뜨린 두 아이의 부모들이다. 이들은 아주 교양 있고 품위 있게 시작하지만 결국은 저마다 1대3으로 다투면서 끝장 분란으로 치닫는다. 이 작품에서는 바로 이 분쟁의 전개 자체에 집중하면 된다. 연극에서는 없던 부분이지만 영화 말미에 이들의 논쟁거리였던 아이들의 싸움과 햄스터의 유기도 그저 핑계였음을 보여준다. 싸운 두 아이는 사이좋게 놀고 있고 가족 몰래 갖다 버린 햄스터마저도 잘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성의 세계에서는 원인이 결과를 설명하는 것 같지만 원인이 결말을 향해 가는 데는 지속적으로 분쟁거리가 조달되기 마련이다. 화해보다 분란을 향해 완전히 다른 측면에서 끝없이 화제를 제공하는 네 인물의 행동을 보면서 분쟁이 어떻게 성장하는가 따져보자. 한 걸음 떨어져서 남의 일, 스크린 속의 일처럼 우리 자신의 일을 생각하다 보면 생각지도 못했던 진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과연 우리의 전투지수를 높이고 화를 내는데 어떤 장작을 던져 넣고 있는가, 어떤 장작을 던져 넣을 것인가.

/윤진현 인문학연구실 오만가지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