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러방지법 처리 저지를 위해 47년 만에 국회에 재등장한 무제한 토론(필리버스터)이 정치사에 남을 숱한 기록과 이야깃거리를 뒤로 한 채 일주일 만인 1일 종료를 눈앞에 두게 됐다.

이번 필리버스터는 지난달 23일 정의화 국회의장이 테러방지법의 처리 지연을 '국가비상사태'로 판단하고 본회의에 직권상정한 것을 계기로 시작됐다.

같은날 오후 7시 6분 시작된 필리버스터는 첫 발언자인 더불어민주당 김광진 의원이 5시간 32분의 기록으로 1964년 김대중(DJ) 전 대통령이 세운 기록(5시간 19분)을 52년만에 깨면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후 같은당 은수미 의원이 무려 10시간 18분간 발언하며 1969년 신민당 박한상 의원이 갖고 있던 한국 신기록(10시간 15분 법사위 발언)까지 넘어섰다. 은 의원이 발언을 마치고 절뚝이며 단상에서 내려오자 소속 의원들이 기립해 은 의원을 포옹하는 모습도 연출됐다.

이후 같은당 정청래 의원이 11시간 39분간 발언하며 앞선 기록들을 모조리 넘어섰다.

당에서 20대 총선 컷오프(공천 배제)를 통보받은 더민주 강기정·김현 의원 등도 힘을 실었다.

강 의원은 토론 중 눈물을 보였고, 연설을 마무리하면서 "제가 꼭 한 번 더 이 자리에서 부르고 싶은 노래"라며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기도 했다.

정의당 서기호 의원은 토론을 마친 직후 국회 정론관에서 20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야당이 주도하는 필리버스터에 새누리당이 날선 반응을 보이며 여야 신경전도 연일 이어졌다.

새누리당 원유철 원내대표는 25일 최고위원회의에서 필리버스터를 두고 "국민 목숨을 볼모로 한 희대의 선거운동", "얼굴알리기 총선 이벤트장"이라고 강하게 비난했고, 새누리당은 본회의장 입구에서 '국회 마비 ○○시간째'라는 등 피켓을 들고 '맞불 시위'를 벌였다.

새누리당 원내지도부는 본회의장 '대기조'를 꾸려 야당 의원들의 발언 시간과 내용을 체크했고, 이 과정에서 일부 발언 의원들은 테러방지법과는 관련이 없는 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여당의 제지를 받으며 논란을 빚기도 했다.

새누리당 조원진 원내수석부대표는 야당 의원의 발언 내용에 대해 거세게 항의하다 더민주 소속 이석현 국회부의장으로부터 퇴장당할 수 있다는 경고를 받는 소동도 있었다.

원 원내대표와 더민주 이종걸 원내대표가 본회의장에서 고성으로 언쟁을 벌이는 장면도 포착됐고, 새누리당 김용남 의원은 더민주 은수미 의원에게 "그런다고 공천 못 받는다"고 야유를 보내다 야당 의원들의 거센 항의를 받았다.

주말에도 필리버스터를 직접 보려는 참관 신청자가 몰리면서 본회의장 방청석이 이례적으로 가득 차는가 하면, 국회 정문 앞에서 '시민 필리버스터'가 진행되고 한편으로 새누리당 예비후보가 '테러방지법 제정 촉구 1인 맞불 시위'를 벌이는 이색 장면도 속출했다.

정의화 의장과 정갑윤·이석현 부의장은 사무실에 간이침대를 두고 쪽잠을 자며 3교대로 의장석을 지켰으나 체력적 한계를 절감, 필리버스터 5일째인 지난달 27일에는 국회 상임위원장들에게 의장석을 맡겼다.

의원들은 장시간 발언에 대비해 금식을 하거나 운동화를 준비했고, 의장단에서는 발판을 설치하도록 해 의원들을 배려했다.

속기사들도 연일 밤을 새우는 등 과중한 업무 부담을 피할 수 없었고, 본회의가 24시간 계속되면서 국회 본관의 문도 일주일째 닫히지 않았다.

영국 일간 더타임스가 다른 나라의 '상상력이 빈곤한' 의원들과 달리 한국 야당의 필리버스터가 공동체적 성과를 보여줬다고 평가한 것을 비롯해 AFP 통신, 로이터통신, AP 통신 등 주요 외신들도 이번 필리버스터를 관심있게 보도했다.

그러나 선거를 앞두고 줄을 이은 필리버스터 발언대가 "선거운동의 장으로 변질됐다"는 여당의 비판에 부닥쳤고, 야당 내부에서도 테러방지법의 문제를 부각시키고지지층을 결집지켰다는 자평도 있지만, 거꾸로 선거법 처리까지 지연시키면서 필리버스터를 지속했어야 했느냐는 반론과 선거 역풍 우려도 고개를 들게 했다.

1일 오후 5시30분 현재 모두 32명의 의원이 발언대에 나서 165시간을 넘긴 필리버스터는 여전히 발언자가 상당수 대기하고 있어 만 7일을 넘기고 오는 2일까지도 이어질 가능성이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