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러방지법 표결처리를 저지하기 위해 47년 만에 국회에 재등장한 무제한 토론(필리버스터)이 정치사에서 기억될 숱한 기록과 이야깃 거리를 남기고 2일 오후 종료됐다.
지난 달 23일 시작된 이번 무제한토론은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이 주축을 이룬 가운데 국민의당·정의당 의원이 가세하면서 9일간 38명이 토론에 참여, 총 192시간25분간 진행됐다.
마지막 발언자로 나선 더민주 이종걸 원내대표는 이날 오전 7시1분 연설대에 오른 뒤 장장 12시간31분간 연설, 국내 최장 발언시간을 갈아치우고 무제한토론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이 원내대표는 발언을 마무리하면서 "눈물을 머금고 내려가지만 저희가 호소한 것을 실현시키기 위해 열정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이번 무제한토론은 지난달 23일 정의화 국회의장이 테러방지법의 처리 지연을 '국가비상사태'로 판단하고 본회의에 직권상정한 것이 계기가 됐다.
더민주 의원들은 지난 2012년 국회선진화법 개정 때 재도입된 국회법 106조 2항(무제한 토론의 실시)을 근거로 무제한토론 실시를 요구했다.
같은날 오후 7시 7분 시작된 무제한토론은 첫 발언자인 더민주 김광진 의원이 5시간 32분의 기록으로 1964년 김대중(DJ) 전 대통령이 세운 본회의 최장 발언기록(5시간 19분)을 52년만에 깨면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후 같은당 은수미 의원이 무려 10시간 18분간 발언하면서 1969년 신민당 박한상 의원이 갖고 있던 국내 최장 발언 기록(10시간 15분 법사위 발언)까지 넘어섰고, 같은당 정청래 의원이 지난달 27일 11시간 39분간 발언하며 또다시 기록을 경신했다.
더민주에서는 20대 총선 공천을 신청했다가 자신의 지역구가 전략공천지역 대상이 돼 사실상 공천에서 배제된 강기정 의원과 현역 의원 평가 하위 20%에 해당돼 '컷오프(공천 배제)'된 김현·임수경·전정희(이후 탈당) 의원도 토론에 나서 힘을 보탰다.
강 의원은 연설을 마무리하면서 "제가 꼭 한 번 더 이 자리에서 부르고 싶은 노래"라며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기도 했다.
정의당 서기호 의원은 토론을 마친 직후 국회 정론관에서 20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새누리당은 야당 의원들의 무제한토론을 '불법 선거운동'이라고 비난하며 야당과 공방을 벌이기도했다.
새누리당 원유철 원내대표는 지난 달 25일 최고위원회의에서 "국민 목숨을 볼모로 한 희대의 선거운동", "얼굴알리기 총선 이벤트장"이라고 강하게 비난했고, 새누리당 의원들은 본회의장 입구에서 '국회 마비 ○○시간째'라는 등 피켓을 들고 '맞불 시위'를 벌였다.
원 원내대표와 더민주 이 원내대표가 본회의장에서 고성으로 언쟁을 벌이는 장면도 포착됐고, 새누리당 김용남 의원은 더민주 은수미 의원이 연설을 시작하면서 '총선예비후보'라고 소개한 사실을 문제삼으며 "그런다고 공천 못 받는다"고 야유를 보내다 야당 의원들의 거센 항의를 받았다.
47년만에 실시된 무제한토론에 대해 유권자들도 적잖은 관심을 보였다.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 공간에서는 야당 의원들의 무제한토론이 연일 화제가 됐고, 국회 본회의장에는 의원들의 발언을 직접 참관하려는 신청자가 몰려 본회의장 방청석이 이례적으로 가득 차기도 했다.
또 국회 정문 앞에서는 야당 지지자들을 중심으로 '시민 필리버스터'가 진행됐고, 이에 맞서 새누리당 예비후보가 '테러방지법 제정 촉구 1인 맞불 시위'를 벌이는 이색 풍경도 속출했다.
AP통신을 비롯해 AFP 통신, 로이터통신 등 주요 외신들도 이번 무제한토론에 관심을 보였다.
AFP통신은 이번 무제한토론이 캐나다의 새민주당이 2011년 기록한 57시간을 경신, 세계 최장 시간으로 기록됐다고 보도했고, 영국 일간 더타임스는 한국 야당의 무제한토론이 공동체적 성과를 보여줬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