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살지 못하는 중장년층 백인계 '낀세대'들 지지
사회적 금기, 제멋대로 허물어뜨리는 것에 '환호'
도처에 깔린 우리 불만세력과 그들은 정녕 다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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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충환 인천 시청자미디어센터장
'침묵하는 다수(silent majority)'는 국가나 집단 내에서 자신의 의견을 드러내놓고 표현하기를 꺼려하는 불특정 다수를 일컫는다. 주로 보수 정치인들이 즐겨 쓰는 표현이다.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은 베트남 반전시위가 한창이던 1969년 11월 3일 연설에서 "특정한 시각을 가지고 거리로 나와 자신의 시각을 나라 전체에 강요하려는 소수에 의해 국가의 정책 방향이 좌지우지된다면 내가 미국 대통령으로서 했던 선서를 지키지 못하는 셈"이라고 운을 뗐다. 이어 반전시위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들을 지칭하며 "그래서 오늘 밤 저는 여러분, 즉 우리 미국 시민들 중 침묵하시는 다수의 분들에게 지원을 요청합니다"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1년 전 대선에서 승리하며 30년 넘도록 지속된 민주당 우위를 종식시킨 닉슨의 자신감이다.

닉슨 이후 45년 만에 다시 미국이 '침묵하는 다수'에 주목하고 있다. 공화당의 '문제적' 대선주자 도널드 트럼프 때문이다. 그의 유세현장에는 "침묵하는 다수가 트럼프를 지지한다"고 적은 피켓이 진을 친다. 닉슨의 '침묵하는 다수'는 하얀 나무울타리로 둘러싸인 집에 살면서, 규칙을 따르고, 세금을 잘 내며, 시위 같은 건 하지 않는, 평범한 중산층 시민들이었다. 그런데 트럼프의 '침묵하는 다수'는 닉슨의 그들과 다르다. 미국 주요 언론에 따르면 트럼프의 '침묵하는 다수'는 잘 살지 못하는 중장년층 백인계층이다. 경제적 혜택을 거의 누리지 못한 '낀 세대'다. 어떤 세대보다 미국 사회에 불만이 많이 쌓여 있는 계층이다. 자신의 경제상황, 불법 이민자들, 미국의 추락하는 국제적 위상에 불만을 갖고 있는 상당수 공화당 지지자들이다. 트럼프는 이들을 지지기반으로 삼아 공화당의 선두주자로 질주하고 있다.

문제는 트럼프의 '침묵하는 다수'가 사회적 금기(social taboos)의 해체에 대해서도 환호하고 있다는 점이다. 트럼프는 인종차별, 종교박해, 여성비하 등 미국사회가 아슬아슬하지만 그런대로 애써 지켜오고 있는 사회적 금기들을 제멋대로 허물어뜨리고 있다. 히스패닉계 멕시코 불법이민자들을 강간범과 마약중독자들이라고 비하하고, 무슬림에 대해선 사원들을 모두 폐쇄하겠다고 으름장을 놨다. 여성혐오성 발언도 서슴지 않는다. 지난해 8월 폭스(Fox) TV 주최로 열린 공화당 대선주자 합동토론회의 진행자였던 여성앵커 메긴 캘러에 대한 '피' 망언이 대표적인 예다. 심지어 그녀를 '빔보(Bimbo)'라고 비아냥댔다. 섹시하지만 '골 빈' 여자를 칭하는 비속어다.

트럼프 지지자들은 자신들이 침묵하는 것은 자신들이 생각하는 것을 말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흑인, 여성, 무슬림 등 특정 집단에 대한 괴롭힘 금지에서 출발한 것이 지금은 너무 과도해져서 자칫 잘못하면 직장을 비롯한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는 불편한 세상이 됐다고 푸념한다. 트럼프는 그런 자신들을 대신해서 속 시원하게 할 말(?) 하면서 박탈감을 달래주는 존재다. 그래서 지지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현실을 돌아보자. 지금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상황을 인정하지 못하는 불만세력이 도처에 포진해 있다. 세대, 계층, 진영 간 상대적 박탈감이 커질 대로 커져 있는 상태다. 사회 전체를 짓누르고 있는 긴장감은 폭발 직전이다.

이런 상황에서 당장 한 달 후면 우리도 선거를 치른다. 지금대로라면 1여다야(一輿多野) 구도다. 특히 수도권의 경우 경쟁양상은 복잡하기만 하다. 선거구획정마저 늦어져 이름을 알릴 기회조차 없었다. 이런 난장판 선거에 뛰어든 이들이 '트럼프의 유혹'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는가. 이주노동자, 다문화가정, 조선족 동포, 탈북자들을 표적으로 삼거나 우파와 좌파, 기독교도와 불교도가 서로 나뉘어져 한 치 양보 없는 대치국면을 펼칠 경우 과연 우리 사회는 어떻게 대처할까. 우리 사회의 '침묵하는 다수'는 트럼프의 '침묵하는 다수'와 정녕 다를까. 트럼프가 원맨쇼를 펼치고 있는 미국선거판이 단순히 재미로만 다가오지 않는 이유다.

/이충환 인천 시청자미디어센터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