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투쟁 수단·정파적 이해 관철 시키는 도구 전락
여야 독선적 '공천활극'에 유권자 어떻게 답할지 궁금
제도 개선·보완 없이는 정당정치 민주주의 정착 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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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창렬 객원논설위원·용인대 교수
20대 총선의 후보 등록이 내일로 다가왔다. 공식선거 기간을 남겨두고 있으나 여야 정당의 정책과 공약이 선거 승패를 좌우할 수 있는 변수가 되기는 애당초 틀렸다. 정책에 대한 쟁점 축이 형성되어 있지 않고 정당들의 공약도 눈에 띄지 않는다. 지난 19대 총선의 무상복지와 급식 등의 의제가 여야간 선거쟁점으로 떠오른 것과 대조된다. 선거를 앞둔 정당의 이합집산과 탈당 등이 낯선 모습들은 아니지만 이번 선거처럼 공천 난맥의 극치를 보인 적은 없었다.

현실정치는 권력정치(power politics)의 관점에서 봐야 제대로 보인다. 도덕주의적 관점은 정치현상을 직시할 수 없게 만듦으로써 역설적으로 현상에 대한 진단과 처방을 제대로 내리지 못하게 하기 일쑤다. 정치는 권력 쟁취를 위한 쟁투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치가 오로지 권력만을 탐하는 게임이라면 정치는 존재할 수 없다. 명분과 이상의 적절한 타협이 정치다. 정당을 통하여 갈등이 관리되지 못한다면 가치의 권위적 배분이라는 정치의 고전적 정의도 의미를 상실한다.

공직자 후보를 추천함으로써 정당은 정치적 충원 기능을 갖는다. 공천을 통한 정치적 충원은 유권자와 당원의 의사에 맞게 이루어져야 한다. 정당은 국민의 혈세로 정당보조금을 받는다. 그것도 선거가 있는 해는 막대한 액수의 선거보조금까지 받는다. 공천이 정당 내부의 일이지만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자의적으로 이루어지면 안 되는 이유다. 공천(公薦)이 정도(正道)가 실종된 공천(空薦)으로 전락하고 있다. 여야 정당들의 공천 드라마에 헌법 1조가 명시하고 있는 주권의 담지자로서의 국민은 애당초 존재하지 않았다. 국민에게 공천권을 돌려준다는 '상향식 공천'은 어설픈 정치이론을 말하는 아마추어들의 논변으로 치부됐다. 국민이라는 추상적 집합체는 권력정치를 신봉하는 세력에게는 단 맛을 안겨주는 수단으로 인식될 뿐이다. 최소한의 명분도 파당을 노골화하는 데 방해가 되면 과감히 폐기된다. 금도(襟度)가 생략된지는 이미 오래다. 명분과 현실을 조화시키는 기술이 정치고, 그래서 정치는 생물이며 가능성의 예술이라고 한다. 그러나 공천이 권력투쟁의 수단으로 변질되고, 정파적 이해를 관철시키는 도구로 철저하게 전락한 정치공간에서 이상과 실리의 접점을 모색하는 정치는 폐기됐다. 여야의 공천은 패거리 정치의 전형이다. 새누리당과 집권세력의 공천활극은 자신들만의 패거리로 국정을 독점하겠다는 권위주의 시대의 망령이 어른거리는 전형적 구시대적 정치 퇴행을 부추기고 있다.

정책과 공약이 선거의 쟁점으로 부각되지 않는 이번 총선은 선거구도가 승패를 좌우할 것이다. 야권의 분열은 선거연합을 통한 야권의 연대 자체를 실종시키고 있다. 연합정치가 사라진 공간은 국민의당 수장의 거친 정치적 수사로 메꿔지고 있다. 수도권에서의 연대를 이뤄낼 만한 정치력은 야당 지도자들에게 원천적으로 결여되어 있었다. 오로지 공천갈등과 공천탐욕만 난무했다. 공천의 잡음이 상대적으로 적었던 더불어민주당은 지도부의 비례대표 공천 탐욕으로 민심 이반을 가속화시킨다. 이번 총선에서의 관심이 집권당의 과반 획득 여부가 아니라 얼마나 압도적 승리를 하느냐에 쏠려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민주화 이후 일반화된 여소야대의 분점 정부는 17·18·19대 때는 집권당의 과반 획득으로 나타났다. 물론 한 두 석의 근소한 여대야소였다. 여당에서 공천 배제된 의원들의 무소속연대의 가능성이 열려있으나 구심을 형성할 리더십의 부재로 얼마나 실현 가능성이 있는지 예단하기 어렵다. 집권세력의 노골적이고 퇴행적 진박 마케팅이 수도권에서 민심의 심판에 직면한다면 새누리당은 국회선진화법의 쟁점법안 통과 의석인 180석을 획득하기 어려울 것이다. 선거프레임 변수와는 다른 차원에서 여야 정당들의 독선적 공천활극에 유권자가 어떻게 화답할 지 궁금하다. 공천제도에 대한 제도적 개선과 보완이 전제되지 않는 한 정당정치를 통한 실질적 민주주의의 정착은 요원하다. 그래서 믿을 건 총알보다 강하다는 유권자의 투표다.

/최창렬 객원논설위원·용인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