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퇴 고민까지 내비치며 배수진을 쳤던 더불어민주당 김종인 비대위 대표가 23일 대표직을 계속 수행키로 하면서, 비례대표 공천을 둘러싼 사흘간의 내홍도 봉합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당 안팎에서는 일련의 사태에서 김 대표가 리더십을 재확립한 것은 물론, 사실상 추대 형식으로 비례대표 2번을 배정받아 총선 후의 활동 기반까지 마련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그러나 막상 비례공천에서 김 대표의 공언과는 달리 친노·범주류·운동권 인사들이 약진했다는 점이나, 당의 근본적인 정체성은 변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한계도 뚜렷하다는 지적도 만만치 않다.
◇ 범주류 '백기투항'에 리더십 재확립…'군기잡기' 성공? = 당내에서는 김 대표의 리더십이 이번 사태로 한층 공고해 졌다는 평가가 우세하다.
우선 친노·범주류 진영과 '전략적 제휴설'과 '갈등설'이 혼재된 가운데 미묘한 관계를 이어오던 상황에서, 친노·범주류가 다수를 점한 중앙위를 강도높게 비판하며 존재감을 확실히 각인시켰다.
김 대표는 20일 중앙위가 비례명단 통과를 무산시키자 "그 따위로 대접하는 정당에 가서 일을 해주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없다"고 맹비난을 쏟아냈다.
이후 거취를 고민하는 모습을 보이며 배수진을 치자 친노의 수장격인 문재인 대표가 직접 김 대표의 자택을 찾아왔다.
김 대표의 순번을 뒤로 돌리려 했던 비대위원들은 한 밤중에 김 대표를 찾아와 사과하고 사의까지 밝혔다.
김 대표로서는 친노·범주류와 비대위원들로부터 '백기투항'을 받은 모양새를 연출, 일각에서 제기됐던 '임시사장' 의혹을 불식시키는 계기가 됐다.
당 관계자는 "김 대표가 '벼랑끝 전술'로 당내 모든 세력들의 무릎을 꿇린 셈"이라며 "성공적인 '길들이기'"라고 평했다.
비례대표 2번에 자신을 '셀프 공천' 했다는 논란도 털어냈다.
문 전 대표는 물론 친노 인사들, 비대위원들이 앞다퉈 "김 대표의 2번 배정은 문제가 없다"고 선언했고, 결국은 사실상 추대 형식으로 2번에 배정되는 듯한 모양새를 갖추는 데 성공했다.
김 대표로서는 총선을 넘어 대선 국면 등에서 활동하기 위한 탄탄한 기반을 마련한 셈이다.
일각에서는 김 대표가 지난 16일 관훈클럽 초청 토론회에서 "킹메이커 노릇은 더이상 안할 것"이라고 언급한 것과 연결, 총선 이후 김 대표가 대권행보에 나설 가능성까지 주목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흘러나온다.
◇ 일각선 "갈등만 노출한채 근본해결 없어…실속은 친노가" = 반대로 이번 사태로 김 대표의 한계만 뚜렷이 드러났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무엇보다 김 대표가 개선 대상으로 꼽은 '운동권적 정체성' 등 당의 근본적인 부분에서는 아무 변화도 없이, 갈등을 잠시 덮어두는데 그쳤다는 분석이 나온다.
김 대표 측의 한 인사는 "김 대표가 운동권 정당문화나 패권주의 등 당의 근본적인 부분이 변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에 막판까지 고민을 거듭했다"고 전했다.
김 대표는 이날 기자회견에서도 "아직도 더민주는 구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일부 세력의 정체성 논쟁을 해결하지 않으면 수권정당으로 가는 길이 요원하다"고 말했다.
이 탓에 일부에서는 조그만 계기라도 생긴다면 당의 정체성을 둘러싼 충돌이 언제든 다시 벌어질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약고'인 셈이다.
이번 사태에서 보여준 김 대표의 소통방식에 반감을 갖는 더민주 당원들이 많다는 점도 변수다.
당의 한 관계자는 "끊임없는 토론으로 의사결정을 해 온 당원들로서는 매우 생소한 타입"이라며 "속으로 불만을 갖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라고 했다.
실제로 김용익 의원은 지난 16일 CBS라디오에서 김 대표를 향해 "독재적 리더십의 성격을 보이고 있다"고 비난했다.
한편 이번 사태에서 실속은 모두 친노·범주류가 가져갔다고 바라보는 시각도 있다.
당의 한 관계자는 "비례대표 최종 명단을 봐도 친노·친문 인사, 운동권·시민단체 인사들이 대거 약진했다"라며 "전문직을 우선 배치하려던 김 대표의 구상은 어그러진 셈"이라고 말했다.
아울러 지금은 총선 직전에 파국을 무조건 막아야 하는 친노·범주류가 김 대표를 떠받치며 둘의 '전략적 제휴'가 유지되고 있지만, 총선이 끝나고 특히 대선 국면에 접어든다면 다시 긴장관계로 돌변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