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될 일도 아니고
남에게 맡겨서도 안된다
나와 타인이, 정치하는 자들과
이를 인정한 사람들 모두가
같은 주권자임을 기억해야
근대 민주주의의 기초가 되는 '자유'란 이념을 최초로 소개하고 정의한 것은 유길준이다. '부(夫) 인민(人民)의 권리(權利)는 기(其) 자유(自由)와 통의(通義)를 위(謂)홈이라.' 무릇 인민의 권리는 그 자유와 통의를 위한 것이다. 여기에서 '인민'이란 낯선 단어는 피플(poeple)의 번역어였고 이는 본디 주역(周易)에 등장하는 단어로 지배자 '人'과 피지배자 '民'을 합쳐 지칭하던 것이었다. 강산이란 단어가 강과 산을 합쳐 자연을 지시하듯 전근대사회에서는 지배자와 피지배자를 합쳐 모든 사람들을 가리켰던 것이고 이것이 주권자이면서 자발적인 권력의 이양을 통해 피지배를 받아들이는 근대 민주주의의 주체, 피플의 역어로 사용된 것이다. 그러니까 유길준은 모든 인간에게 자유와 정의의 권리가 있음을 충격적으로 접수하였던 것이다. 유길준은 '자유'란 '기심(其心)의 소호(所好)하는 대로 하사(何事)든지 종(從)하야 궁굴구애(窮屈拘碍)하는 사려(思慮)의 무(無)홈을 위(謂)홈'이라고 요약한다. 자유란 그 마음이 좋아하는 바대로 어떠한 일이든지 따라 막히고 굽히고 얽매이고 거리끼는 생각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보통 이렇게 자유를 정의하고 나면 걱정을 한다. 자유다라고 하면서 제멋대로 행동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우려다. 유길준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고 자유가 '임의방탕(任意放蕩)하는 취지(趣旨) 아니며, 비법종자(非法縱恣)하는 거조(擧措) 아니오, 우(又) 타인(他人)의 사체(事體)는 불고(不顧)하고, 자기(自己)의 이욕(利慾)을 자령(自逞)하는 의사(意思) 아니라.'고 명시한 것이다. 제멋대로 행동하며 난동을 부리거나 법도를 어기고 제멋대로 하는 것을 의미함이 아니요, 타인의 일과 체면을 돌보지 않고 자신의 이욕대로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라는 명백한 한정이다. 물론 그렇다. 그러나 이러한 정의는 기본적으로 개인의 자유가 타인의 자유와 대립한다는 전제하에 전개되고 있다. 유길준 스스로도 지적했듯이 임의방탕하고 비법종자하는 것은 자유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임의방탕과 비법종자를 인간의 자유와 혼동할 필요가 없고 혼동해서도 안 된다.
유길준의 정의가 온전해지려면 궁굴구애를 일으키는 '어떠한 일(何事)'이 무엇인지 먼저 해명되었어야 할 일이었다. 물론 어렵지는 않다. 이는 공포를 조장하고 생각을 속박하며 사상을 검열하고 판단을 조종하는 그 모든 것, 요컨대 그 모든 압제를 지시한다. 그러니까 아니다, 틀렸다 의심하고 판단하면서도 걱정 때문에 혹은 눈 앞의 이익 때문에 표현하지 못하고 주장하지 못하는 것이 있다면 우리는 부자유한 것이다. 즉 인간이 타고난 자유와 정의를 누리고 실현하려면 궁굴구애를 일으키는 어떠한 일이 먼저 없어져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러한 상황에 이의를 제기하고 문제를 해결하며 세상을 더 나은 세상으로 만들어가야 할 것이니 그것은 나 혼자 될 일도 아니요, 남에게 맡겨서도 안될 일이다. 요컨대 나와 타인이, 정치를 담당한 자들과 이를 승인한 자들이 모두 같은 주권자임을 기억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만인을 위해 일할 때, 만인을 위해 싸울 때 나는 자유다'라고 김남주 시인이 제안하는 획기적인 '자유'의 정의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이 만인에는 나와 우리가 함께한다. 특정한 계층, 특정한 지역이 아니라 나로부터 시작한 이 세상 모든 사람을 위한 자유를 생각할 때이다.
/윤진현 인문학연구실 오만가지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