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재철수도권기상청장2
남재철 수도권기상청장
우리 민족은 지난 수천 년 동안 '농자는 천하지 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라 하면서 농업을 중시했다. 글을 모르는 농부도 씨앗을 뿌려야 할 때와 김을 맬 때를 알았고, 하늘, 달, 구름만 보아도 그때 그 시절에 필요한 날씨를 알 수 있는 지혜를 가지고 있었다. 이는 요즘 기상청의 장기예보나 다름없는 '24절기'를 겪으면서 쌓인 체험과 경험에서 비롯되었다.

24절기는 중국 주(周)나라 때 화북 지방에서 날씨와 동식물의 변화를 면밀히 관찰해 붙인 이름이다. 지구가 태양의 둘레를 도는 길인 황도(黃道)를 따라 15°씩 돌 때마다 절기의 이름을 붙였다. 즉, 태양의 움직임에 따른 기온, 강수량, 일조량 등 기상요소가 변하기 때문에 중국 황하 유역과 우리나라에서 농사를 짓는 데 아주 유용하게 활용되었다.

봄을 알리는 절기인 입춘(立春)이 지나고 우수(雨水)가 되면 날씨가 거의 풀리고 봄바람이 불기 시작하며 새싹이 돋아난다. 낮과 밤의 길이가 같아지는 춘분(春分)이 되면 농부들은 논밭에 뿌릴 씨앗의 종자를 골라 파종 준비를 서두르게 된다. 4월에는 농사 시작의 중요한 절기가 되는 청명(淸明)과 곡우(穀雨)가 있다. 청명은 4월 5일께고 날이 풀리기 시작해 본격적인 농사가 시작되는 날이다. 이 무렵을 전후해 찹쌀로 빚은 술을 청명주(淸明酒)라 하며, 이때 장을 담그면 맛이 좋다고 하여 한 해 동안 먹을 장을 담그기도 한다. 곡우에는 봄비가 내려서 못자리를 준비하여 일 년 농사를 준비하게 되고 벼농사 외에도 각종 농작물의 파종 시기이기도 하다.

입하(立夏)는 5월 5일로 봄이 완전히 퇴색하고 여름이 시작되며, 산과 들에는 푸른 잎들이 돋아나고 마당에는 지렁이들이 꿈틀거린다고 한다. 못자리에는 볍씨의 싹이 터 모가 한창 자라고, 밭에는 보리 이삭이 패기 시작한다. 소만(小滿)에는 햇볕이 풍부하고 만물이 점차 생장하여 가득 찬다는 의미가 있다. 이때는 본격적으로 여름이 되어 모내기가 시작되고, 보리가 익어가며, 잡초 제거로 바쁜 시기이다. 하지만 이 시기는 '보릿고개'란 말이 있을 정도로 양식이 떨어져 힘겹게 연명하던 때이기도 하다. 망종(芒種)은 씨를 뿌리기 좋은 시기라는 뜻으로 모내기와 보리 수확이 절정을 이루면서 농촌에서는 1년 중 가장 바쁜 시기이다.

이처럼 오래전부터 천수답이 많았던 우리나라에서 논밭을 일구고 씨를 뿌리며 곡식을 수확하는 것을 면밀히 살펴보면 24절기를 기준으로 진행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또한 간장, 고추장도 담고 된장도 가르고 김장을 하는 시기를 결정하는 것도 달력에 적힌 절기가 중요한 기준이 되었다.

하지만 최근 세계적인 이슈가 되고 있는 기후변화로 인하여 24절기가 잘 맞지 않고 있다. 개나리 벚꽃이 일찍 개화하고 빨리 오는 초여름, '뜨거운 5월 예고'가 24절기에 익숙해 있던 우리에게 혼란을 주고 있다. 미국 국가정보위원회(NIS)의 미래 전략보고서에 따르면 기후변화에 따른 에너지, 식량, 물 문제가 21세기의 가장 심각한 세계적 현안으로 보고 있다. 18세기 후반에 시작한 산업혁명으로 지난 200여 년 동안 배출된 온실가스에 기인한 기후변화가 2천여 년 이상 이어오던 농사기술에 대혼란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후손들에게 식량 걱정을 물려주게 되었다.

기후변화로 인한 농업 피해는 점차 증가하고 피해를 복구하는 것보다 사전에 피해를 줄이기 위해 기존 24절기를 대체 할 수 있는 기후변화시대에 맞는 지혜가 필요할 때이다. 선조들은 경험으로 배웠지만 우리는 경험으로 배우기에는 시간이 많지 않다. 부족한 시간 대신 기후변화로 인한 농업 피해를 예방할 수 있는 정책 개발의 노력이 더 필요한 시대이다.

/남재철 수도권기상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