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 전권 쥐고 항상 우렁차고 당당했던 어머님
여행중 '못이룬 인생계획' 풀며 쓸쓸해 했던 표정
가끔 "니가 억지로 끌고 다닐때가 좋았다"고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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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맑실 사계절출판사 대표
결혼해서 애를 낳고부터는 4대가 함께 살았다. 시할머님, 시부모님과 함께 마당이 있는 낡은 2층집에서 17년을 살았다. 두 아이들은 그네들의 어린 시절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그 집의 수많은 추억들을 유리알 들여다보듯 기억한다. 분가를 한 후 몇몇 아파트로 옮겨 다니며 살았는데 아이들은 아파트의 기억들을 떠올릴 때면 한참을 더듬거린다. 나 역시 아파트 시절에 대한 기억은 늘 가물가물하다. 간짓대를 세운 빨랫줄에 이불을 널어 탕탕 털 수 없는 곳, 한밤중에 식구들끼리 마음껏 노래하고 웃고 떠들 수 없는 곳, 베란다 문을 열면 마당으로 나갈 수 없는 곳, 그곳 아파트.

거실 유리창 문짝이 맞지 않아 문을 잠글 수도 없어 좀도둑이 들락거렸던 낡은 집이었지만, 시동생까지 여덟 식구가 복작이며 살았던 그 집에서의 수많은 에피소드는 줄거리는 물론, 등장하는 사물의 색깔이며 사람들의 표정까지, 여태 생생히 살아 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그 시절, 큰며느리인 나는 집안일이 서툴렀다. 삶을 살아내는 방법도 어설프기 짝이 없었다. 어느 노래 가사처럼 "삶의 작은 문턱조차 쉽사리 넘지 못했던" 시절이었다. 어머님의 지청구를 듣지 않는 날이 드물었다. 직장 다니는 며느리를 대신해 집안일과 아이들 키우는 일을 비롯, 연로하신 어른들까지 챙겨야 했던 어머니는 새벽부터 내가 퇴근하는 저녁까지 하루 종일 가사 노동의 연속이었다. 그러다가 내가 집에 있는 휴일이나 주말이면 긴장을 풀고 집안일을 나에게 맡겼는데 그때는 감독관의 위치에 설 수밖에 없었으리라. 부족한 것 투성이였던 나는 종종 어머니의 잔소리 속에서 휴일과 주말을 보내곤 했다. 가끔 남편과 아이들과 여행이라도 갈라치면 여행 내내 긴장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집에 계신 어른들 때문에 나 스스로 안절부절 못했던 것이다.

어느 날, 결단을 내렸다. 극심한 차멀미 때문에 어머니는 여행을 엄두도 못 냈다. 나 역시 어머니는 당연히 여행을 못하는 분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어머니를 설득하고 또 설득해 초등학생이던 아들과 나, 어머니, 셋이서 아들의 여름방학 숙제를 빙자해 경주로 3박4일 여행을 떠났다. 남편은 거동이 불편한 시할머님을 모셔야 했기에 중학생인 딸과 함께 집에 남았다. 어머니와 떠난 그 첫 여행을 나는 평생 잊지 못한다.

내가 운전대를 잡는 순간, 모든 게 역전되었다. 집에서 전권을 쥐고 있던 어머님이었으나 일단 동네를 벗어나자 모든 걸 나에게 맡기고 어린아이처럼 순해지셨다. 고속도로를 달리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쏟아지는 폭우를 만났을 때도 나를 믿어 주었고, 경주에서 몇 번이나 길을 잃고 헤맬 때에도 조금도 조급해하지 않고 기다려 주었다. 모든 일정과 선택을 나에게 맡긴 채 오로지 여행을 즐겼다. 그렇게 시작한 어머니와의 여행은 기회 있을 때마다 어머니를 설득해, 분가하기 전까지 꽤 오랫동안 이어졌다. 여행이 거듭될 때마다 어머니와 함께하는 즐거움도 늘어갔다. 술에 대해선 엄격하던 어머니도 설악산 오색 약수터의 한 토속음식점에 들어가서는 나물을 안주 삼아 달큼한 머루주를 한 잔 들고 건배했다. "하따, 너 이거 갖고 안 될 것인디 한 병 더 허지 그냐?" 하며 늦은 밤까지 술을 권했다.

어머님과 이렇듯 살가워지는 것 말고도 여행의 소득은 또 있었다. 어느 해, 변산반도 여행길에 내소사에 도착하자마자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졌다. 내소사 입구의 커다란 보리수나무 아래 우산 받쳐 쓰고 앉아 어머니는 끝내 이루지 못한 당신의 처녀 적 인생 계획을 잔잔히 풀어 놓았다. 집 안에서의 우렁차고 당당한 모습과는 다른 어머니의 쓸쓸한 표정을 읽어낸 순간, 어머니가 나와 같은 한 여자로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어머님이 혼자 사신 지도 4대가 함께 산 세월만큼 되어 간다. 지금도 종종 어머님은 말씀하신다. "아야, 맑실아. 텔레비전에서 우리나라 명소라고 소개할 쩍마다 난 하나도 부럽지 않더라고. 다 가본 곳잉께. 그때 니가 억지로 나를 여그저그 끌고 다닐 때는 차멀미도 심허고 힘든 것만 같드니만 참 그때가 좋앗시야잉~"

/강맑실 사계절출판사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