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드뱅크로 간신히 밥은 먹지만 산 송장이나 다름없지….”

된서리가 내린다는 '상강'(음 9.10)이 하루 지난 24일 오후, 낡은 옷장에서 겨울옷을 꺼내면서 이(57)씨는 좀처럼 말을 잇지 못했다.

광명시 하안동 영구임대아파트에 살고 있는 이씨는 18개월째 관리비와 임대료를 내지 못한 장기 체납자다. 3년전 거리에서 허리를 다친뒤 유일한 생계수단이었던 공공근로마저 할 수 없게 됐고 장성한 아들이 있어 기초생활수급대상자에서도 제외됐다.

12평 허름한 임대아파트와 인근 사회복지관에서 배급하는 푸드뱅크가 이씨의 유일한 생존조건이다.
 
이씨는 “수중에 천원짜리 한장 없다”면서 “아들도 연락되지 않고 언제 쫓겨날지 모를 신세이다보니 당장 닥친 겨울이 원망스러울 따름이다”고 말했다.
 
몸져 누운 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같은 아파트의 박(36)씨는 그나마 정부보조를 받는 기초생활수급자이기는 하나 사정은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환풍기 설치작업을 하는 박씨는 최근 건설경기가 악화되면서 좀체 일감을 찾지 못해 아버지 치료비와 중학생인 아들 학비를 제하고 나면 간신히 '입에 풀칠'만 하는 상황이었다.
 
박씨는 “한두달 관리비를 못내다보니 어느덧 14개월이나 됐다”면서 “목돈을 쥘 수 없으니 보증금에서 깎이더라도 그렇게 버틸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전국에서 가장 규모가 큰 영구임대아파트 단지인 광명 하안13단지. 이곳의 체감온도는 이미 한 겨울을 지나고 있었다.
 
전체 3천292세대 중에 895세대가 관리비와 임대료를 내지 못하고 있으며 특히 이 가운데 100여세대는 계약해지가 가능한 4개월이상 연체자이다.
 
다른 임대아파트도 사정은 마찬가지여서 수원 우만3단지의 경우 전체 1천213세대 가운데 25%에 해당하는 301세대가 연체중이다. 또 연체금액을 기준으로 따지면 연체율이 37%까지 올라가는데 이는 그만큼 장기 연체자가 많다는 얘기다.
 
이처럼 관리비가 잘 걷히지 않는데다 정부 지원도 거의 없다시피 하다보니 대부분 10년이 넘은 이들 노후 아파트의 관리상태는 말이 아니었다.
 
단지내 도로와 화단 등 겉으로 보이는 곳은 제법 돌본 흔적이 있으나 정작 내부는 70년대 지어진 아파트처럼 심하게 낡아 있었다.
 
때절은 벽지, 문짝이 떨어져 나간 주방가구, 깨진 욕실 타일 등 어느것 하나 성한 것이 없고 바퀴벌레까지 창궐, 위생환경도 의심스러워 보였다.
 
관리공단 관계자는 “현재 걷히는 관리비와 임대료로 내부 수리는 엄두도 못낸다”면서 “난방비 부담이 큰 겨울에는 사정이 더 악화될 것”이라고 걱정했다.


공공요금 감면·운영비 보조 절실

장기 경기침체에 따른 고달픈 서민생활의 단적인 예를 보여주는 곳이 임대아파트다.
 
특히 기초생활수급대상자를 비롯해 극빈층의 마지막 보루인 영구임대아파트의 경우 임대료와 관리비를 내지 못하는 가정이 속출하면서 아파트단지의 운영 및 관리에 있어서도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다.
 
◇장기체납자 실태=도내 영구임대아파트는 총 1만8천여세대로 주택공사에서 관리를 맡고 있다.
 
주공이 지난 6월 집계한 자료에 따르면 영구임대아파트를 포함해 도내 전체 임대아파트(5만1천여세대)의 임대료 및 관리비 체납률은 15%에 달하고 있다.
 
이 가운데 3개월이상 장기체납자를 대상으로 퇴출근거를 마련하기위해 제기되고 있는 민사소송건수도 605건에 달한다. 이들 가정은 소송절차가 마무리되는 대로 걸거리로 나앉아야할 처지인 셈이다.
 
따라서 국민임대 및 5년·50년 공공임대아파트보다 훨씬 사정이 열악한 영구임대아파트만 따로 떼어놓고 보면 이보다 훨씬 심각한 결론이 나온다.
 
실제로 대부분의 영구임대아파트 관리소측에서는 체납가구가 20% 이상을 차지하고 있으며 이들 상당수가 장기체납자라고 밝히고 있다. 장기체납자가 많다보니 체납액을 기준으로 할 경우 체납률은 30~40%에 이르는 실정이다.
 
특히 한달 3만~5만원의 난방비가 추가부담되는 겨울에는 체납률이 급상승할 것으로 우려되고 있다.
 
◇정부·주공, 관리는 뒷짐=영구임대아파트는 지난 90년대 초부터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했다.
 
따라서 대부분 영구임대아파트의 나이는 10~15년 정도로 아직 한계수명에는 한참 남았지만 체납률 증가와 이에따른 관리부실로 급속히 망가지고 있는 실정이다.
 
여느 아파트단지와 다를바 없는 외관과 달리 영구임대아파트 내부는 재건축을 앞둔 노후아파트만큼 폭삭 낡아 있다.
 
지은지 14년째인 광명 하안13단지의 경우 올해 처음으로 주방기기가 교체됐을 뿐 지금까지 이렇다할 수리를 하지 않았다. 도내 나머지 임대아파트는 아직 내부기기 교체일정도 잡혀있지 않은 상황이다.
 
아파트주민들은 임대료및 관리비를 연체하는 상황에서 적극적으로 관리서비스 개선을 요구할 수 없는 처지이고 관리소측도 현재 운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