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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의 길 막혀 학교 못간 대신
양잠공장에 취직한 엄마
내가 작가된걸 가장 기뻐한 사람
나는 조력자이고 나를 통해
꿈 이뤄진 것이라고 믿고 싶다
긴잠끝에 날개 갖는 누에들 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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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금희 소설가
오래전부터 나는 엄마가 어렸을 적 '글짓기 선수'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글짓기상을 받아오면 으레 엄마의 칭찬 뒤에 아쉬움이 어느 정도 깃든 "엄마도 글짓기를 잘했는데…" 하는 말이 들려왔다. 그 말의 무게를 진지하게 받아들인 건 고등학생이나 되어서일 것이다. 엄마는 공부를 잘했지만 위아래로 남자형제들이 있었고 조부모는 아들들에게만 교육의 기회를 주었다. 학교에 더 다니지 못하게 된 엄마는 상처를 받아 아주 내성적이고 소극적인 성격으로 바뀌었다고 했다. 배움의 길이 막혀버린 소녀가 가졌을 아쉬움과 슬픔, 절망과 분노 같은 것을 생각하면 내 마음도 비슷한 질감의 감정으로 바뀌곤 했다.

엄마는 학교에 못 간 대신 그 당시로서는 '일급 직장'이었던 농협의 양잠 공장에 다니게 되었다. 누에들이 사각사각사각 뽕잎을 갉아먹는 그곳에서 소녀인 엄마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어떤 꿈을 꾸었을까. 그러니까 삶이 누에들의 것처럼 변하고 나아가는 것이라고 믿었을까. 아니면 결국 자기 몸을 실로 꽁꽁 감싸고 들어가 고립된 채 깊은 잠을 자는 것이라고 믿었을까. 어쨌든 후에 소녀는 고향에서 벗어나 더 넓은 세상, 대도시로 나가는 것을 선택했다.

내가 작가가 된 것을 가장 기뻐한 사람도 당연히 엄마였다. 요즘 나는 이달 말에 나올 두 번째 소설집 작업을 하고 있는데 거기 실릴 사진을 골라달라고 부탁하자 엄마 꿈을 대신 이뤘네, 하는 말부터 들려온다. 엄마도 백일장에 자주 나갔는데 '학교 가는 길'이라는 제목의 글로 큰상도 받았다고. 백일장 이야기는 전부터 들어왔지만 제목에 대해서는 처음 들었고 나는 곧 먹먹해졌다. 학교 가는 길에 대해 글을 짓고 '일등 선수'가 되었지만 정작 학교에는 더 이상 갈 수 없었던 소녀. 그래서 영영 말을 안 해버리고 싶었다는 양잠 공장의 소녀. 그 소녀가 세월이 흘러 지금 내 앞에서 꿈을 대신 이뤘구나 하는 말을 전하고 있다. 다행히 나는 겉모습마저도 엄마와 아주 닮았고.

엄마가 조금 늦게 태어났다면 그렇게 해서 정말 학교 가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면 나는 엄마가 나보다 훨씬 나은 소설가가 되었으리라 믿는다. 소설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에 대한 관심과 애정인데 엄마에게는 그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꿈을 누군가가 대신 이룬다는 것이 가능할까. 그 꿈의 당사자가 아니라 꿈의 조력자라는 것은 어쩌면 더 깊은 아쉬움으로 남지 않을까. 불가능해진 꿈에 대한 회한 같은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 때면 소설이 쓰이는 과정에 대해 생각한다. 사실 소설은 혼자 쓰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쓰게 하는 수많은 조력자의 역할 덕분에 완성되지 않는가. 생각해보면 소설뿐 아니라 생 자체가 그런 조력의 힘으로 굴러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모두가 모두의 조력자인 세계, 그러한 세계에서 작가란 자신을 작가이게 하는 조력자들의 생을 받아 적고 조명하면서 존재하는 것이고.

소설을 쓴다. 거기에는 내가 가본 적 없는 양잠 공장이 있고 단잠을 자는 애벌레들을 지켜보면서 최선은 아니지만 차선의 꿈을 이리저리 궁리해보는 소녀가 있다. 그 뒤 소녀의 꿈은 여러 번 수정되어야 했지만 아주 어긋나버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소녀가 여기까지 오는 동안 만났던 세계는 가치 있는 것으로 기록되고 있으니까. 그렇게 기록되는 동안에는 내가 엄마의 조력자이고 나를 통해 결국 엄마의 꿈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믿고 싶다. 엄마에게는 차선의 삶이었더라도 내게는 당연히 최고의 삶으로, 몇 번의 긴 잠 끝에 마침내 날개를 갖게 되는 누에들의 그것처럼.

/김금희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