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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이나 정전 다시 읽으면서
현재와 매개하는 '고전의 시대'를
새롭게 만들어 가야 한다
지난날의 위대한 사유들을
끌어 오려는 충동처럼
'기억의 원형' 만들어가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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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호 문학평론가·한양대 국문과 교수
사람마다 자신이 경험한 것 중 오래 남아 있는 '기억의 원형' 같은 것이 있는 법이다. 더구나 그것이 문학 작품이라면, 그것도 그 안에 눈부시게 담긴 어떤 강렬한 순간이라면, 그 장면이나 표현은 언제나 새로운 파문을 그리면서 저마다의 삶을 새롭게 해주고도 남을 것이다. 최근 우리 시대를 고전(古典)이 없는 시대라고 볼멘소리도 하지만, 우리는 살아가면서 어느 한순간 접했던 고전의 기억들을 반추하며 호흡하고 살아간다. 그 점에서 고전이 주는 기억의 힘은 여전히 중요한 삶의 자양이자 동력이라 할 것이다.

내게 그러한 기억은 가장 먼저 '어린 왕자'의 저 유명한 삽화들과 함께 떠오른다. 비행기 조종사로 하늘을 날다가 삶을 마감한 생텍쥐페리의 이 소설(요즘 유행하는 말로 하면 '어른을 위한 동화'쯤 안 될까?)은 그만큼 강렬한 기억의 수원(水源)으로 존재한다. 이 작품은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는 보이지 않는 법이야"라든가 "사막이 아름다운 건 어디엔가 우물이 숨어 있기 때문이야" 같은 잠언(箴言)으로도 오랫동안 기억되고 있는데, 자연스럽게 "내가 너를 길들이면 너는 나에게 이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사람이 되고 나는 너에게 둘도 없는 친구가 될 것"이라는 표현도 따라 붙는다. 이 작품은 어린 왕자가 자신의 거처인 소혹성을 떠나 지구의 한 사막에 도착하여 비행사인 '나'와 나누는 대화로 이어져간다. 결국 사막에서 어린 왕자가 사라지는 서사로 끝이 나는데, 이 애틋하고도 순수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는 많은 이들에게 보석처럼, 별빛처럼, 그렇게 반짝이며 각인되어 있다. 그만큼 생텍쥐페리는 비행기를 날개 삼아, 고공(高空)의 동료들이 빌려준 펜으로 이 아름다운 동화를 완성한 것이다. 그가 창조해낸 어린 왕자로 인해 우리는 '별'과 '사막'을 향해 다가서기를 주저하지 않게 되었지 않은가. 그렇게 어린 왕자는 우리를 길들이고 자기의 별로 돌아갔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은 한 소년이 삶의 익숙한 틀을 깨고 전혀 새로운 세계로 성숙해가는 이야기를 담은 '성장소설'이다. 우리는 주인공 싱클레어가 자신을 발견해가는 과정을 통해, 삶의 성숙이라는 고전적 테마를 읽는다. 싱클레어는 자신을 둘러싼 세계의 속살을 하나씩 경험해가는 과정에서 데미안이라는 친구를 만난다. 그는 차츰 데미안의 시선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을 배워가는데, 그 점에서 데미안은 그의 친구이자 영락없는 스승이기도 했다. 그는 막 날아오르려는 새를 그려 데미안에게 보내고, 데미안 역시 더 나은 세계를 향해 날아가는 새와 아프락사스라는 신(神)에 대한 이야기를 담아 답신을 한다. 이때 이 작품은 "새는 알에서 나온다. 알은 새의 우주다. 한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가려면 그 한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그 새는 아프락사스에게로 날아간다." 같은 명문장을 반짝거린다. 특별히 싱클레어가 내면으로 들어가 데미안과 똑같은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는 마지막 장면은, 두 사람이 주고받았던 오랜 신뢰의 시간을 명료하게 보여준다. 우리도 헤세처럼, 싱클레어가 데미안과 하나의 몸이 되는 것처럼, 새가 알을 깨는 고통을 통해 다른 세상으로 나오는 것처럼, 자신의 세계를 넓혀가는 과정에 따르는 고통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법을 배운다. 싱클레어와 데미안이 그렇게 가르쳐주었으니까 말이다.

우리는 기원(origin)이나 정전(canon)을 되 읽으면서 그것을 현재와 매개하는 '고전의 시대'를 새롭게 만들어가야 한다. 마침 시민대학 같은 데서도 마르크스나 공자, 플라톤이나 사마천 같은 고전들이 새삼 인기를 끌고 있다는 점도 지난날의 위대한 사유들을 오늘에 끌어오려는 충동을 낱낱이 입증하고 있지 않은가. 그 과정을 통해 우리는 새로운 '기억의 원형'을 만들어간다. 고전이 주는 위대한 기억의 힘이 아닐 수 없다.

/유성호 문학평론가·한양대 국문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