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간 국가대표 자격박탈 족쇄' 불공정한 재기의 룰
스물일곱 살 선수에게는 '사형선고'와도 같은데…
대가 치르고 반성한다면 '재기 허락되는 사회'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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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충환 인천 시청자미디어센터장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기대를 모았던 남자축구가 예선 탈락하자 우스갯소리가 유행했다. "축구장에 물 채워라. 박태환 수영하게" "축구장에 물 얼려라. 김연아 피겨하게" 이 대회 수영 남자자유형 400m에서 박태환은 쟁쟁한 경쟁자들을 모두 제쳤다. 아시아선수가 올림픽 수영 자유형에서 우승을 차지한 것은 72년만의 일이다. 세계 수영사의 일대 사건이었다. 건장한 체격에 맑은 눈빛을 띠고, 수줍은 표정을 짓는 박태환은 단박에 '국민 남동생'이 됐다.

박태환의 시작은 불운했다. 열다섯 살 소년이 2004년 아테네올림픽에 한국선수단 최연소 국가대표로 출전했다. 그러나 물속에서 킥 한 번 제대로 해보지 못한 채 실격 당했다. 부정출발이었다. TV를 지켜보던 국민들은 "뭐야? 쟤?"하고 어이없어 했다. 자신도 경기장 화장실에서 두 시간이나 울다 나왔다고 한다. 실은 심판의 실수와 선수단의 무지가 합작해 빚은 해프닝이었다. 심판이 "준비(Take your marks)"라고 지시하면 선수들은 출발대 앞부분에 적어도 한 발을 걸친 채 정지자세를 취한다. 그 다음 출발신호가 울린다. 그런데 당시 심판은 선수들이 정지자세를 취한 상태에서 돌연 "제자리로(Stand please)"라고 지시했다. 경기중단 선언인 셈인데, 국제수영연맹의 출발규칙에도 없는 내용이다. 잔뜩 긴장해있던 박태환이 그 소리를 출발신호로 잘못 들었던 것이다. 물에서 나온 박태환은 실격이라고 생각했다. 뒤늦게 심판이 불렀지만 어깨를 늘어뜨린 채 탈의실로 들어가 버린 뒤였다. 한국선수단은 어떻게 된 일인지 상황판단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어른들은 무지했고, 소년은 상처를 입었다.

똑같은 장면이 2012년 런던올림픽에서 재현됐다. 결과는 달랐다. 중국의 수영영웅, 박태환의 라이벌 쑨양은 남자자유형 1500m 결승에서 출발신호가 울리기 전에 물에 뛰어들었다. 부정출발로 판정되면 실격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재경기 결정이 내려졌다. 국제수영연맹 측은 "장내가 너무 소란스러워 스타트 버저 대신 선수들에게 '제자리로(Stand please)'를 지시했는데 이때 쑨양이 물에 뛰어들었다"고 설명했다. 결국 재경기 끝에 1위로 들어온 그가 포효하더니 이내 펑펑 울기 시작했다. 경기 직후 가진 인터뷰에서 "실격 판정을 받을까봐 너무 두려웠다. 머릿속이 하얗게 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고 속내를 털어놨다. 스물한 살의 세계적인 수영 스타가 이러할진대 그때 열다섯 살 소년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불운을 딛고 일어난 박태환은 4년 뒤 '국민영웅'이 된다. 숭례문 누각이 불길에 휩싸여 무너져 내리는 현장을 두 눈으로 지켜본 국민들의 상처 난 자존심을 어루만져줬다. 신산(辛酸)한 국민들의 마음에 위로와 치유의 행복바이러스를 마구마구 퍼뜨렸다. 뒤를 좇는 후배들에겐 '표상'이고, '롤모델'이었다. 그런 박태환이 지금 나락에 떨어져 있다. 영웅의 몰락, 표상의 해체는 안타깝지만 현실이다. 이러쿵저러쿵 전해지고 보태지는 말들이 많지만 귀책사유는 모두 박태환에게 있다. 변명의 여지가 없다. 그래서 박태환은 그 대가를 치렀다. 문제는 대가를 치른 그 다음이다.

한국사회는 성공만큼이나 재기에 있어서도 불공정한 구조를 갖고 있다. '금수저'들에게는 재기가 너무나 쉽게 허락되지만 '흙수저'들에겐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1년 8개월 선수자격 정지라는 대가를 치르고 돌아온 박태환에게 다시 3년간 국가대표가 될 수 없다고 족쇄를 채우는 것 또한 불공정한 재기의 룰이다. 만약 그가 유력한 정치인이나 재벌, 또는 대한체육회 경기단체장의 아들이라고 해도 이중처벌 규정이 저토록 견고하게 유지될까? 스물일곱 살 수영선수에게는 사형선고와도 같은데 말이다. 금수저든 흙수저든 그 누구라도, 저지른 잘못에 대해 응당한 대가를 치르고 반성한다면 재기가 허락되는 사회, 공정한 패자부활시스템이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사회, 과연 그런 사회에서 내가 살아볼 수 있을까? 이번 리우올림픽에서 박태환을 그럴 가능성의 단서로 만날 수 있을까?

/이충환 인천 시청자미디어센터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