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의사 투옥중 간수였던 치바씨
국운 걱정과 민족 독립위해
몸 바친 안의사 보고 감동
사형대로 가기 직전에
'위국헌신군인본분' 문구 받아
소중하게 간직 매일 명복 빌어

해외근무를 하다 보면 한일관계의 역사의 현장을 방문하는 경우가 있다. 특히 센다이 영사로 부임하기 전 중국 선양에 근무할 때 하얼빈과 다롄을 관할하며 하얼빈역의 이토히로부미 저격장소, 하얼빈 안중근 기념관, 대련사의 안중근 감옥 박물관 등을 방문한 적이 있다. 다롄의 우리 조선족 동포들은 안중근 의사에 대한 글짓기 대회를 열어 안 의사를 추모하는 마음을 한민족 후손들에게 면면히 이어가게 하고 있다. 안중근 의사는 중국에서도 주은래를 비롯한 많은 중국인으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는 인물이다.
필자의 근무지가 센다이로 변경되고 나서 안 의사 관련 유적지가 이곳에도 있다는 것에 무척 놀랐다. 단순히 유적지만 있는 것이 아니라 매년 안 의사의 추모위령제를 지내고 한국에서 오는 안중근 숭모회 회원들과 한일우호교류회를 개최하고 있었다.
얼마 전 화사한 5월 연휴를 이용해 교외의 대림사를 방문했다. 이곳에는 1981년에 세워진 '위국헌신군인본분(爲國獻身軍人本分)'이 쓰인 '안중근 의사 현창비(顯彰碑)'가 있다. 이 비석 뒤에는 안 의사와 간수였던 치바 도시치(千葉十七)간의 교류를 칭찬하는 당시 미야기현 지사의 현창비문이 있다. 이 내용이 상당히 감동적이라 공유하고 싶은 마음에 비문의 내용을 일부 옮겨 적어 본다. 많은 이들이 대림사를 방문해주기를 기대한다.
안중근 의사와 치바씨의 현창비문
국가의 쇠망에 직면해 의병을 일으켜서 구국의 영웅이 된 대한의병안중근참모중장(1879-1910).
때는 1909년(명치42년) 10월 한민족의 주권을 빼앗은 일본의 대륙침공 선봉으로 보인 이등박문은 그의 손에 의해 하얼빈역에서 사망했다. (생략) 서로 대립하는 이와 같은 현실에서 총독부 육군 헌병이었던 이 지역 출신의 치바 도시치(당시 25세) 씨는 여순 감옥에 투옥 중인 안중근 의사의 간수 역할을 맡게 됐다.
우직하고 정의감에 넘치는 동북의 사나이였던, 치바 씨의 눈에 비친 옥중 안중근 의사의 언행은 말 그대로 국가의 운명을 걱정하고 민족의 독립과 명예를 지키기 위해 몸을 바친 청렴한 인격의 선비였다. 때때로 언급하는 평화에 대한 고매한 이념에는 깊은 감동을 받았다. 안 의사를 칭송하는 것을 공공연하게 할 수 없는 당시의 정세에도 치바 씨는 안 의사에 대한 동정을 금할 수가 없어서 마음 속 깊이 존경심을 품게 돼 안 의사를 위해 모든 정성을 다하게 됐으며 마침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됨을 매우 마음 아파하고 있었다.
안 의사 또한 당시의 일본인으로서 매우 특별한 치바 씨의 인간미 넘치는 대우에 답해 3월 26일 사형대로 가기 직전에 군인다운 치바 씨에 적절한 문구를 붓으로 적어 선물했다. 즉 '위국헌신군인본분(爲國獻身軍人本分)'(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은 군인의 본분이다).
치바 씨는 귀향 후 안 의사의 초상과 유묵을 불단에 모시고 매일같이 고인의 명복을 빌었고, 그의 부인도 남편의 유지를 받들어 안 의사와 치바 씨의 명복을 기도하다 세상을 떴다. 그의 후손 역시 수많은 곤란을 무릅쓰고 치바 씨의 뜻을 받들어 안 의사의 유묵 '위국헌신군인본분'을 70년간에 걸쳐 소중하게 보관해 왔다.
(생략) 치바 도시치의 유족은 (생략) 고국의 안중근 의사 숭모관에 이 유묵을 바쳤다.
국가에 있어서 귀중한 유품을 그 국가의 국민에게 돌려주는 이러한 아름다운 일을 기념해, 안중근 의사와 치바 도시치의 매우 희귀하고 고귀한 마음과 행동을 칭찬하고 높이 받들고자 일본의 문화인, 정치가, 일본에 거주하는 한국인과 미야기현 유지들이 치바 씨가 잠들어 있는 오카야나기 대림사에 이 비를 건립한다.
안 의사의 탄생일을 기해 일한양국의 영원한 우호를 기념하며…. 1981년 3월 26일 미야기현 지사 야마모토 소이치로
/양계화 주센다이대한민국총영사관 총영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