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name01
삼릉 마을의 미쓰비시 중공업 사택. /계산여중 제공

일제시대 '조병창' 美 캠프마켓으로 이어져
삼릉마을 등에 노동자 거주 흔적 아직 남아


부평이라는 지명은 삼국시대 이래 주부토군, 장제군, 수주, 안남, 계양, 길주, 부평으로 다양하게 불리다가 조선 시대부터는 부평이 됐습니다. 지금의 서구, 부평구, 계양구 전체와 부천시, 심지어 서울 일부까지 아울렀던 부평(富平)은 이름 그대로 '드넓은 평야가 펼쳐진 풍요로운 지역'으로 독립적인 행정구역으로 인천과 함께 발전했습니다.

현재 계양구 계산삼거리 인근이 중심지였던 옛 부평의 첫 번째 변화는 1899년 개통된 경인선 철도로 인한 중심지 이동이었습니다. 당시 제물포와 노량진 사이를 연결했던 철도를 직선으로 만들다 보니 옛 부평 중심지와 거리가 먼 지금의 부평역 자리에 철도역이 건설됩니다.

요즘 말로 하면 '부평 입구역' 쯤 되는 것이죠. 당시 부평역 근처는 인가도 거의 없는 황량한 벌판이었는데 점차 개발되기 시작해 현재는 부평의 중심지가 됐습니다.

부평이 두 번째 큰 변화를 겪게 된 것은 일제의 통치 정책에 따라 1914년 인천과 합쳐지게 된 것입니다. 보통 2개 도시가 합쳐질 경우 통합된 이름을 무엇으로 할 것인지가 중요합니다.

인천의 '인'자와 부평의 '평'자를 넣어 '인평'으로 할지, 부평의 '부'자와 인천의 '천'자를 넣어 '부천'으로 할 것인가입니다. 결국, 부천으로 정해졌다는 것은 그때까지 부평의 위상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개항장에 있던 인천부가 확장하면서 부천지역 대부분을 편입해 인천광역시 소속이 된 것입니다.

세 번째로 부평이 겪은 변화는 일제에 의해 부평 일대에 대규모 병참기지가 만들어지게 되면서입니다. 중일 전쟁 이후 필요한 군수물자를 생산하기 위해 이미 1930년대 말부터 일본 육군 조병창이 들어섰고, 관련 부품을 생산했던 히로나까 공장도 준공됐습니다. 히로나까 공장은 미쓰비시(三菱:삼릉) 중공업에 의해 인수됩니다.

군사도시로 재정비된 부평 일대에는 강제 징용 등으로 공장에 끌려온 조선인 노동자들이 머물 대규모 주택 단지가 들어서게 됩니다. 현재 부평공원 자리에 있던 미쓰비시 공장의 노동자 집단 숙소는 부평역 남쪽에 만들어지는데 원래 이름인 동수라는 지명 대신 '삼릉' 마을이라고 불리게 됩니다.

지금은 노후해진 대부분 건물이 재개발되고 일부 건물만 남아있는데, 이조차 일제 잔재로 남겨 보존할 것인지 지역 주민들이 활용할 수 있게 재개발할 것인지에 대해 논쟁이 되고 있습니다.

조병창은 해방 이후 6·25전쟁 중 미군기지인 '캠프 마켓'으로 제공됩니다. 당시보다 많이 축소됐지만, 현재까지도 18만 평이라는 넓은 부평의 중심지를 차지하고 있는 캠프 마켓은 올해 반환될 예정입니다.

그러나 현재 미군 1명이 근무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미군기지는 폐기물과 관련된 환경오염과 여러 사정으로 반환이 늦춰지고 있습니다. 조병창에 근무하는 노동자들의 집단 거주지로 만들어진 영단 주택은 산곡동 일대에 남아있는데 이곳도 재개발을 앞두고 있습니다.

인천의 중심축이 되는 부평은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도심 중심지가 이동하고 군수공업지대로 만들어지면서 현재와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됐습니다. 이전까지가 타의에 의해 변화가 주도됐다면 이제부터는 시민들의 삶을 향상할 방향으로 부평의 모습이 변화되길 기대해 봅니다.

/이제은 계산여중 교사

※위 우리고장 역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