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도 땅집 생활의 추억이 생생하다고 말해
오두막이라도 마당만 있으면 공간 확장성 커져

이 오두막들은 마을과 떨어져 있어 이웃과 더불어 혹은 식구들과 더불어 사는 집의 형태는 아니다. 다만 나에게 오두막은 전 국민의 반 이상의 주거 형태가 되어버린 아파트와 대별되는 지점에서 떠올리게 되는, 그래서 늘 갈망하게 되는 주거 형태이다. 나 역시 숨 막히는 아파트의 숲에서 종종 탈출하고 싶어 오래 전 서울 근교의 산 중턱에 여섯 평짜리 농막을 지었다.
건축가 유현준은 자신의 책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의 곳곳에서 한국형 아파트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고층 아파트는 우리에게서 머리 위의 하늘을 빼앗아 갔다. 이웃과 소통하던 골목도 없다. 아름다운 자연경관 주변을 아파트 단지로 차단함으로써 모두가 누려야 할 자연을 독점해가고 있다. 천장 높이는 2.25m로 모두 똑같아 답답하고 변화가 없다. 이불을 말릴 수 있던 발코니, 하늘이 보이던 발코니, 자연과 호흡하는 창구였던 발코니는 알루미늄 새시로 막혀 유리창 벽으로 변해버렸다.
어디 그뿐이랴. 한밤중에 식구들끼리 맘 놓고 크게 웃을 수 없는 곳, 큰 소리로 노래할 수 없는 곳, 간짓대 세워 이불을 털어 말리고 그 이불 사이로 아이들이 숨바꼭질할 수 없는 곳, 일상에서 상처를 입고 잠 못 이루는 밤 발코니에 서면 위로해주는 마당 대신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을 불러일으키는 곳. 이런 곳에 추억이 깃들기 어렵고 그래서 아파트는 기억을 앗아가는 공간이기도 하다. 기억을 생생하게 하는 것은 시간이 아니라 공간이다. 초등학교 4학년 때 광주 누문동 집에 정착하기 전까지 나는 무려 아홉 번이나 이사를 다녔다. 중고등학교 교장이었던 아버지의 발령횟수에 더해, 해남이나 성전 같은 시골로 발령받으면 광주에 셋방을 얻느라 몇 번 더 이사했던 것 같다.
일본식 관사나 양옥이 있었는가 하면 한옥도 있었고 뭐라 특징을 말할 수 없는 집들도 있었다. 주거 형태는 갖가지였지만 비록 좁더라도 언제나 마당이 있었고 나무와 꽃이 있었으며, 개와 고양이와 노루와 토끼와 닭과 염소가 있었다. 방 한 칸에 부엌이 달린 그야말로 오두막이었던 셋방에서부터 복도가 길고 큰 방이 여러 개 있었던 일본식 집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집에 살았는데, 마당 넓은 신안동 기와집에 살 때의 기억이 제일 다채롭다. 내 어린 시절의 기억은 아홉 개의 집과 더불어 때론 유리알처럼 투명하게, 때론 무성영화의 한 장면처럼 떠오른다. 어린 시절에 살던 집의 순례는 곧 기억의 순례이기도 하다. 결혼해서도 두 아이들이 초등학교 다닐 때까지는 아파트가 아닌 '땅 집'에서 살았다. 그 후 10년간 아파트에서 살 수밖에 없었는데 그 10년은 나에게 혹독한 시간 들이었다. 신기하게도 두 아이들 역시 '땅 집'에서의 시절은 기억이 생생한데 아파트에서의 기억은 흐릿하다고 말한다. 아이들의 기억도 시간이 아니라 공간 이었던 것이다.
아무리 작은 오두막이라도 손바닥만 한 마당만 있으면 100평짜리 아파트보다 공간의 확장성이 커진다고 한다. 맞는 말이다. "가을이면 은행나무 은행잎이 노랗게 물드는 집, 해가 저무는 날 먼 데서도 내 눈에 가장 먼저 뜨이는 집, 생각하면 그리웁고 바라보면 정다운 집"으로 시작하는 김용택의 시, '그 여자네 집'처럼 찬란한 추억이 함께하는 공간은 '땅 집'인가 아파트인가.
/강맑실 사계절출판사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