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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을유문화사에서 출간된
청록파 3인의 기념비적 시집
자연을 재현한 독자적 성취이자
우리말 리듬과 이미지를
예술적 형상속에서 구현한
해방직후 가장 빛나는 '사화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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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호 문학평론가·한양대 국문과 교수
3인 시집 '청록집(靑鹿集)'은 1946년 6월 6일 을유문화사에서 출간되었다. 을유문화사는 1945년 12월 민병도, 정진숙, 조풍연, 윤석중에 의해, 해방되던 해인 을유년을 기념하여 세워진 출판사이다. 세칭 '청록파'로 기억되는 세 분의 시인이 펴낸 이 기념비적 시집은, '자연'을 현대시의 중요 대상으로 재현해낸 독자적 성취이자, 우리 말의 리듬과 이미지를 높은 예술적 형상 속에서 구현한 해방 직후의 가장 빛나는 사화집이다.

일제 말기에 이들을 '문장'으로 등단시킨 정지용은 해방기에 조선문학가동맹과 거리를 현저하게 좁히면서 활동하였다. 하지만 그는 식민지 시대의 화려했던 시사적 자취와는 다르게 별다른 시적 진경을 전혀 보여주지 못했다. 그럼에도 정지용은 후배 시인들에게 여전히 깊은 숲이자 커다란 그늘이자 발생론적 역상(逆像)으로 존재했다. '청록집'이라는 시집 이름 역시 정지용의 '백록담(白鹿潭)'(1941)과 뚜렷하게 마주보는 형국을 취한 것이다. 5년 터울의 흰색과 청색의 뚜렷한 마주보기는 '청록파'의 발생론과 분기(分岐)를 동시에 보여주기에 족한 것이다. 그러다가 정지용은 1948년 1월 정음사에서 나온 윤동주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서문에서 자신이 "8·15 후에 부당하게 늙어간다"라고 썼다. 해방 후 자기 시 세계에서 한 발짝도 진척을 보이지 못했던 그는 후배 시인의 유고 앞에서 "무릎을 꿇고" 분향하며 "무시무시한 고독에서 죽었고나!"라고 외쳤지만, 그 '무시무시한 고독'은 그 스스로의 몫이었을지도 모른다. 결과적으로 정지용은 조선문학가동맹에서 활동하다가 단독정부가 서자 보도연맹에 가입하는 등 굴곡 많은 고독한 세월을 보냈다.

해방 직후 을유문화사에 취직한 박두진은 '문장' 출신 시인들의 사화집을 계획하였다. 김종한은 타계하였고, 박남수와 이한직은 이런저런 사정으로 참여하지 못했는데, 그때 박두진은 박목월과 조지훈에게 요청하여 세 사람이 한데 어울려 시집 한 권을 을유문화사에서 내자고 제의하였다. 그렇게 세 명이 모여, '백록'의 정지용 추천으로 나왔으니 시집 제목을 '청록'이라 하자고 합의하였다. 시집 제목이 목월의 '청노루'에서 유추된 것이라는 증언은 아마도 지용 월북 후의 '조정된 기억'일 것이다. 을유문화사에서는 '지용시선(芝溶詩選)'을 1946년 5월 30일에 김용준의 장정으로, '청록집'을 그로부터 꼭 1주일 후에 김용준의 장정, 김의환의 인물 삽화로 간행하였다. 1주일 차이를 둔 것은 아마도 스승을 먼저 앞세우려는 일종의 예우였을 것이다. 이때 '청록집'표지에 실린 저자들의 순서가 눈에 띄었는데, 두루 알다시피, 박목월, 조지훈, 박두진의 순이었다.

나이순이면 박목월, 박두진, 조지훈의 순서가 맞다. 당대 관행으로 돌아가 초회 추천순이면 조지훈, 박두진, 박목월이 맞다. 그리고 요즘 하는 식으로 가나다순을 취하면 박두진, 박목월, 조지훈이 맞을 것이다. 그런데 순서는 박목월, 조지훈, 박두진이었다. 이는 박두진이 자신이 계획하여 펴내는 책에서, 그것도 자신이 있는 을유문화사에서 내는 책에서, 자신의 이름을 제일 뒤로 뺀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다만 판권 난 저자 이름에 박두진은 자신 이름을 적어 넣었다. 그래서 수록 순서에서는 제일 뒤로 빠졌던 그의 이름이, 마지막 페이지에 "저자대표 박두진"이라고 씌어 있게 된 것이다. 그러니 그 이름의 순서를 작품의 질적 판단에 의한 편집자의 구성이었다고 보는 것은 전혀 '청록집' 발간 내력을 모르고 하는 소리가 된다. 가령 '문장' 체재에서 당시 편집인이었던 이태준이 자신의 작품을 대부분 제일 나중에 싣는 것과 같은, 자신이 내자고 제의했던 당사자로서 취한 일종의 겸양적 뒷자리였다고 할 수 있다. 목월이 15편, 지훈이 12편, 혜산이 12편을 실어 모두 39편의 서정시가 실린 이 사화집은, 그러한 맥락을 배경으로 하여 해방 직후 정치 지향성에 새로운 미학적 가능성을 부여한 빛줄기였다고 할 수 있다. 올해는 그 빛이 지상에 쏘인 지 70년 되는 해이다.

/유성호 문학평론가·한양대 국문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