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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생가 전경. /부흥고 제공

두물머리 인근 마을 '마재'에서 나고 자라
정치풍파속 목민심서등 업적… 고향서 작고

40세에 강진으로 유배를 간 후 그곳에서 18년을 보낸 정약용도 자신이 나고 자란 곳, 사랑하는 가족들이 사는 곳을 그리워했을 거예요. 오늘은 정약용이 태어난 곳, 유배지에서 그토록 그리워했던 곳, 삶의 마지막을 맞았던 정약용의 생가를 찾아가려 합니다. 정약용 생가는 남양주시 두물머리 근처에 있는 마현(마재)이라는 마을에 있답니다.

정약용이 이곳 마재 생가에서 태어난 1762년 특별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세상을 떠난 해였습니다. 정조는 영문도 모른 채 아버지가 할아버지에 의해 목숨을 잃는 것을 지켜보는 아픔을 겪었지만, 정약용은 정재원의 넷째 아들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많은 사랑을 받으며 자랐답니다.

그 두 인물은 21년이 지난 후 처음으로 만나게 됩니다. 정조는 역경을 이겨내고 최고 자리에 오른 왕으로, 정약용은 과거에 합격한 성균관 유생으로 말입니다. 정약용은 이곳에서 친구들과 어울려 두물머리 강변을 뛰어놀았을 거예요. 그런데 어릴 때부터 영특한 모습도 보였답니다.

4살 때는 천자문을 익혔고, 7살에는 자신이 본 것을 시로 표현해 아버지를 놀라게 하는 재능을 갖고 있었죠. 정약용은 어릴 적 재미있는 별명도 갖고 있었답니다. 천연두를 앓은 후 남은 흉터가 왼쪽 눈썹을 둘로 나눠 마치 이마에 눈썹이 3개인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3개의 눈썹이라는 의미의 '삼미'라는 별명이었죠.

정약용은 목민관으로 백성들에 대한 애정을 품고 있었답니다. 정약용이 36살이 되던 1797년의 일이었답니다. 그는 곡산의 부사로 임명됐죠. 그 지역은 무리하고 부당한 군포 징수와 관련해 불만이 많았던 백성들이 들고일어났던 곳인데 그때까지 문제가 해결되지 못한 상황이었답니다.

주변에서는 주동자를 찾아내 엄벌을 내려야 한다고 했지만, 오히려 곡산 부사로 임명된 정약용은 주동자를 무죄로 석방했고 그 지역 주민들의 생활을 어렵게 만든 불필요하고 과다한 세금을 징수하지 못하도록 했답니다. 이러한 마음은 그의 저서 <목민심서>에도 그대로 드러나 있답니다.

마지막으로 정약용은 가족에 대해서도 애틋했답니다. 자신보다 더 먼 흑산도로 유배를 간 형인 정약전을 염려하는 마음이나 자신이 집을 떠나 있을 때 세상을 떠난 어린 자식들에 대해 슬퍼하는 모습을 보면 당대 최고의 정치인이자 학자였던 정약용도 한 사람의 동생이자 아이들의 아버지였던 것이죠.

특히 정약용은 아내가 보내온 붉은 치마의 색이 바래자 그것을 잘라 서첩을 만들고 그 위에 두 아들에게 교훈이 되는 글을 써서 보냈답니다. 또 시집간 딸에게는 예쁘게 꽃을 피운 매화 가지 위에 앉은 새 두 마리를 그리고 그 아래에 꽃이 활짝 피었으니 그 열매도 무성할 것이라는 의미의 글을 적어 딸이 행복한 가정생활을 할 수 있길 바라는 아버지의 마음을 전했답니다.

정약용이 지은 수많은 글이나 책들이 지금까지 높이 평가를 받는 것은 그가 일흔다섯의 삶을 살면서 겪은 수많은 경험과 주변 사람들에 대한 진심을 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정약용은 세상을 떠난 후 생가 뒷동산에 부인과 함께 묻혀 지난 시절을 추억하고 있답니다.

/김효중 부흥고 교사

※위 우리고장 역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