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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균 성산효대학원대학교 효문화학과 교수
얼마 전 스위스에선 전 국민에게 매달 300만원씩 준다는 복지정책 시행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를 실시 하였고, 부결되었다는 소식이다. 국민 누구에게나 똑같이, 그것도 우리네 보통 사람 한달치 봉급에 해당하는 금액을 공짜로 주겠다고 하는 것도 놀랍고, 이를 부결시킨 국민들 반응도 놀랍다. 얼마나 많은 세금을 거두고 있길래, 얼마나 강한 복지정책을 펼치길래 이런 구상을 했나 싶기도 하다.

몇 해 전 서울에서도 무상급식에 대한 비슷한 투표를 실시했지만, 투표율 저조로 개표도 못해보고 무산된 적이 있다. 결국 이를 제안한 서울시장만 자진 사퇴하고, 전국적인 무상급식 열풍에 불만 붙였다. 복지정책 차원에서 무상시리즈는 이후로도 계속되었고, 앞으로도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태세다. 복지정책에 관한한 비록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여야, 보수 진보 가릴 것 없이 경쟁적으로 도입하고 있다. 국민의 기본적 욕구 충족과 최소한의 권리를 보장한다는 차원에서 복지란 필수불가결한 요소이니, 어찌 보면 당연한 귀결이다.

문제는 보편복지란 말에도 복지정책에도 있지 않다. 복지를 공짜로 인식하는데 문제가 있다. 누군가 부담을 하고 있기 때문에 복지 차원의 무상이 실현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상급식'이란 말은 어불성설이다. '공짜 밥'이란 있을 수 없다.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무상급식이 가능한 것은 국민세금이 되었든 누군가 부담을 했다는 것이다. 돈이 있는 집안이든 없는 집안이든, 차별적 복지든 보편적 복지든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다. 복지가 공짜라고 생각하는 게 심각한 문제다.

부담자가 있다면, 또 그것이 국민세금이라면 무상이란 말은 곤란하다. 아무리 수혜자 입장에서 무상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최소한의 국민적 기본권리 보장이란 차원에서의 용어이지 공짜가 될 수 없다. 특히 학교에서 무상, 즉 공짜란 말은 극히 조심해야할 비교육적인 말이다. 돈을 지불한 것과 지불하지 않은 것엔 엄청난 차이가 있다.

보편복지가 당연한 사회적 흐름이라도, 복지를 공짜로 생각하게 하는 것은 자라나는 학생들에게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자라나는 세대를 위해 누군가 부담을 대신하였다면 무상급식이란 말 대신 새로운 용어를 사용해야 한다. 예컨대, 청소년들을 위한 급식이라면 '희망급식'이라 할 수도 있고, 수혜자의 입장에서 부담자를 생각한다면 '감사급식'이 되어야 한다.

돈을 지불한 음식이라면 아까워서라도, 배가 불러도 수저를 놓지 않는다. 비싼 돈을 지불한 음식은 맛이 없어도 버리지 않는다. 남은 음식 싸 갖고 가는 이유를 생각해보면 자명하다. 우리의 아이들에게 주어지는 급식이 국민적 세금에서 충당된다고 한다면 음식을 함부로 버릴 수 있겠는가. 급식시간, 자라나는 세대에게 음식의 소중함을 가르치고, 감사한 마음을 가르쳐야 한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어느 학년까지 무상급식을 제공하는가가 아니라 급식을 통해 얼마나 고마운 마음을 갖게 할 것인가가 되어야 한다. 그 마음을 갖도록 한다면 아무리 많은 학생들이 급식 혜택을 받는다 하더라도 아까울 것이 없다. 청소년 인성교육을 위해 투자하는 그 어떤 예산보다도 소중한 결과물이 급식시간을 통해 나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야는 물론 진보, 보수의 무상급식논쟁은 자연스레 사라질 것이다. 우리의 학교급식이 '감사급식' '희망급식'이 되어야할 이유이다.

/김덕균 성산효대학원대학교 효문화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