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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성 청덕고등학교 교장
지난 3월 서울시교육청이 일선 학교에게 친일인명사전 구입 예산을 강제로 배정하여 반발과 논란이 있었다. 그 후 경기도교육청에서도 751개 중·고교에 예산을 배정하여 또다시 논란이 되었다. 이미 친일파 세력의 당사자들이 없는 상황에서 뒤늦게 하는 일들 때문에 후손들이 반발하고 있는 것이다.

친일인명사전은 일제강점기 친일 반민족행위를 자행한 친일파의 목록을 정리해 발간한 사전이다. 여기에는 일제의 침략을 지지 찬양하거나 민족 독립을 방해하고 일제 식민통치에 앞장선 4천389명의 친일행적이 수록되어 있다.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는 이유는 해방 후 친일파 처단과 일제 잔재 청산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결과 때문이다. 과거 청산은 시기를 놓쳐 버리면 혼란만 가중시킨다. 때늦게 이루어진 친일 잔재 청산이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로 정리되어 미래 지향적 국민 통합의 기능을 해야 하는 데 그러지 못한 것이다.

프랑스는 4년의 나치 독일 점령 기간의 과거사를 단호히 청산하여 1944년 8월부터 8개월 동안 12만4천600여명을 재판에 회부하고 6천763명에게 사형을 선고하였다. 실제로 767명을 사형시켰고, 9만8천명을 징역에 처하였다. 네덜란드, 벨기에, 노르웨이는 이보다 더 엄격하였다. 부역행위로 구속된 사람의 숫자가 10만명당 프랑스 94명, 벨기에 596명, 네덜란드 419명, 노르웨이 633명이었다.

이에 반해 우리는 친일 과거사 청산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어이없게도 해방 후 미군정 치하에서 친일 세력들이 행정의 주역이 되었고, 뒤이은 이승만 정권에서 친일 세력이 정치의 중심세력이 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만들어진 '반민법'은 이미 커질 대로 커져 버린 친일파들에게 제대로 힘을 쓸 수가 없었다. 8개월간의 공소시효 속에 반민특위의 취급 건수는 682건에 기소 221건, 재판 40건이었다. 그 결과 체형이 14명이었고, 실제 사형 집행은 단 한 건도 없었다.

친일파 처단이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승만 정권의 반대와 이미 해방 3년이란 시간이 흘러가 버렸고, 그동안 친일파 세력들이 기득권 세력으로서 국가권력에 강고하게 뿌리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승만 정권의 반공주의에 친일파들이 앞장서 주도세력으로 변하였다. 오히려 많은 독립운동 인사들이 공산당으로 낙인찍혀 가혹한 탄압을 받았다. 광복군 출신 장준하의 말처럼 '적반하장의 세월이 왔고, 독립을 위해 이름 없이 피를 흘리고 쓰러진 주검 위에서 칼을 든 자들을 군림하게' 하였다. 안타깝게도 우리 역사에서 8·15해방은 민족의 완전한 자주독립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일제 식민지 질서의 철저한 청산도 아니었다. 독일과 달리 일본이 그들의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온갖 망언을 되풀이하는 작태를 보이는 것도 우리들이 친일파 처단 등 친일잔재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결과이다.

친일파 문제를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 채 7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친일인명사전' 문제로 논란을 벌이고 있는 것이 안타깝다. 제때 하지 못하고 넘긴 미완의 역사적 과업이 남긴 후과가 크다. 우리 스스로 우리의 일들을 제대로 하지 못한 탓에 수없이 사죄를 해도 마땅치 않을 일본이 식민 통치 침략 죄과에 대한 사죄는커녕 때 없이 자행하는 저들의 식민지 미화 망언과 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오만하기 이를 데 없는 고압적 태도와 무시로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것이 모두다 우리 스스로 친일파 처단 등 친일 잔재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결과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것은 다 때가 있다. 제 시기에 친일파 문제를 정리하지 못하고 식민지 시대 친일 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후유증이 자못 크다.

/김유성 청덕고등학교 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