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기심이 발동한 필자는 "그럼 6·25전쟁을 아느냐"고 다시 물어보았다. "글쎄요… 잘 모르겠는데요. 일본이 쳐 들어온 거 아닌가요?" 순간 나는 어안이 벙벙해져 왔다. "OOO씨 시간 나면 인천상륙작전 영화 꼭 한번 보세요"라며 말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나라 신세대들의 한국 현대사에 대한 무지는 우리 기성세대 모두의 책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폭염만큼이나 뜨겁게 이슈로 떠오르는 영화 '인천상륙작전'의 주인공은 맥아더 장군이다. 그러나 한국 전쟁과 인천상륙작전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또 한 사람의 주연이 있다. 그가 바로 월튼 워커(Walton H. Walker 1889~1950) 미 8군 사령관이다.
워커 장군은 1950년 7~8월 북한 공산군의 대대적인 공세에 밀려 후퇴를 거듭하던 한국의 전황이 최악의 시점에 다다랐을 때 낙동강 최후 방어선(일명 워커라인)을 성공적으로 지켜냈다. 워커 장군에 의한 낙동강 최후 방어선 사수가 없었다면 한국전쟁에서 일거에 전세를 역전시킬 수 있었던 인천상륙작전도 있을 수 없었고 나아가 오늘의 대한민국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한국전쟁의 영웅 백선엽 장군은 회고록에서 밝히고 있다.
워커 장군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용맹을 떨치며 독일의 전쟁 영웅이었던 롬멜이 지휘하던 전차 군단을 격파하는데 혁혁한 공훈을 세웠다. 종전 후 주일 8군 사령관으로 근무하던 중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유엔사령관으로 임명된 맥아더장군은 불독이라고 별명이 붙은 맹장, 워커 장군을 한국 전선으로 급파하여 낙동강 최후 방어를 맡기게 되었다. 1950년 7월 13일 낙동강 전선에 급히 도착한 워커 장군은 북한군의 공세에 밀려 후퇴를 거듭하고 있던 한·미 장병들에게 불퇴전의 각오로 전선에 임하라고 작전명령을 하달하였다고 한다.
"우리는 더 이상 물러설 곳도 물러날 곳도 없다. 무슨 일이 있어도 후퇴는 없다. 내가 여기서 죽더라도 끝까지 한국을 지키겠다"면서 북한 공산군에 연전연패하며 불안에 떨던 우리 군과 국민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었고, 이런 장군의 의지로 아군은 낙동강 전선을 지켜냈고 부산 교두보를 기점으로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할 수 있었다.
워커 장군은 1950년 12월 23일 미 24사단 보병 소대장으로 의정부 전선에 있던 자신의 외아들 샘 심즈워커 대위에게 은성 무공훈장을 수여하기 위해 방문하던 길에 마주오던 한국군 트럭과 충돌하는 교통사고를 당한다. 워커 장군은 죽음 직전에 사고 책임을 묻는 것에 반대하며 순직했다고 한다.
워커 장군의 아들 또한 아버지처럼 용맹한 군인이었다. 미군 당국은 샘 대위에게 부친의 시신을 본국으로 운구하라 했지만, 이를 거부하며 끝까지 한국 전선에 남아서 싸우겠다고 하자 맥아더 장군이 직접 샘 대위를 유엔군 사령부가 있던 일본 도쿄로 불러 귀국 지시를 내렸다고 전해진다.
세계 지도상에서 영원히 사라질 뻔했던 대한민국, 당시 미국의회에서조차 많은 미군이 희생되자 조기 철수하자는 분위기가 팽배하였다. 그 속에서 반전의 역사를 쓴 장군을 기리기 위해 훗날 한국정부에서는 미군 휴양 시설이 있던 서울 광나루 언덕에 호텔을 신축하고 장군의 이름을 기리기 위해 워커힐 호텔이라 명명하게 되었다.
요즘 한반도의 사드배치 문제로 온 나라가 시끄럽다. 우리는 워커 장군의 참다운 군인 정신과 한국을 마지막까지 사랑했던 고인의 희생으로 인해 오늘날 자유와 번영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다. 세월이 흘러도 장군의 고귀한 희생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임익찬 (주)임산업 회장· 재능대학교특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