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여자가 삶의 얼룩이
비밀스럽게 묻은 빨래를
바삭바삭 부서지는 햇볕에
말리고 싶어 널고 있다
'깨끗한 햇빛마음'으로
돌아가는 순간을 보고 싶은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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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은교 시인
며칠을 벼르다가 오늘에사 빨래를 했다. 그런데 널려고 보니 마땅치가 않다. 햇볕이 사납게 내려쬐는 폭염이라고 야단들인데 말이다. 기껏 그림자 진 베란다에 놓은 빨랫대엔 햇볕은 못쬐더라도 바람이라도 쐬라고 잔뜩 이불이며 요를 펴놓았으니 젖은 빨래를 널 곳이 없는 것이다. 마당이 없으니 그렇지, 나는 중얼거린다. 그러고 보니 나는 결혼해서 집을 떠나온 이후로 아파트에서 산다. 말하자면 일생을 허공에서 사는 모양새다. 인생이라는 것이 허공에서 왔다가 허공으로 사라지는 것이니 마땅하다고 자조섞어 생각하긴 하지만, 모처럼 빨래를 한 오늘같은 날엔 마당있는 집이 부럽고 그립다.

그러고 보니 세탁기도 문제다. 아파트에 간단히 들여놓을 수 있으니, 그리고 손이 영 덜 가게 해주니 고마운 물건이기도 하지만, 한 편 생각하면 빨래가 주는 큰 미덕을 세탁기는 빼앗고 있는 셈이다. 왜냐하면 수돗물을 세차게 틀어놓고 빨래를 세차게 물에 흔들며 헹구는 행위는 스트레스 해소에 아주 좋다는 말을 어느 심리학 교수에게서 들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이해인 수녀시인의 시에도 빨래라는 시가 있지 않은가. '우울한 날은 /빨래를 하십시오/맑은 물이/ 소리내며 튕겨 울리는/노래를 들으면/마음이 맑아진답니다//…… //기도하기 힘든 날은 /빨래를 하십시오…… 저절로 기도가 된답니다//……' <이해인 '빨래를 하십시오' 중에서>

그러고 보니 '다라이'에 빨랫거리를 잔뜩 넣고 세차게 흔들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리곤 하얗게 부서지는 햇볕 아래 잔뜩 그 빨래를 널었었던 기억도. 산꼭대기 동네였다. 아파트가 아닌, 마당 있는 집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때 살았던 전셋집이 내가 살았던 집중에 가장 넓었던 집이었던 것 같다. 마침 아기들을 막 키우기 시작했을 때였으므로 하얀 기저귀가 하얗게 부서지는 햇볕 아래에 만국기처럼 휘날리던 그 반듯하던 마당! 기저귀들이 마르는 소리가 '바작바작'하고 들리던 속깊은 마당!

언제부턴가 도시의 괜찮은 고층아파트에선 빨래를 보기가 힘들어졌다. 빨래에야말로 인간의 내면 깊숙이 들어 있는 그 무엇. 삶의 지극히 개인적인 비밀, 얼룩…… 그런 것이 묻어 있음을 생활형태의 진보와 함께 사람들은 깨달은 것인가. 그래서 그것을 세상에 내미는 일이 새삼스럽게도 몹시 부끄러워진 것인가.

얼마 전 여행한 크로아티아의 드보르브닉엔 빨래널린 골목, 창이 아주 많았다. 아드리아해에 면한 옛 성곽에서 내려다보니, 빨간 지붕들 사이로 빨래들이 햇볕을 쬐며 마구 휘날리고 있었다. 같이 간 사진작가는 그 풍경을 찍느라고 바빴다. 하긴 이국의 그곳도 서민들이 빨래의 비밀스런 얼룩을 부끄러울 새도 없이 마구 내보이고 있는 곳이리라.

나의 시 중에도 '빨래너는 여자'라는 시가 있음이 생각난다. 바다에 면한 부산의 감천길을 가면서 본 어떤 옥상 풍경. 한 여자가 삶의 얼룩이 비밀스럽게 묻은 빨래를 널고 있었다. 그 여자는 삶의 무용을 하듯이 발끝을 한껏 세우고 빨래의 주름을 펴고 있었다. '햇빛이 바리움처럼 쏟아지는 한낮, 한 여자가 빨래를 널고 있다, 그 여자는 위험스레 지붕 끝을 걷고 있다, 런닝 셔츠를 탁탁 털어 허공에 쓰윽 문대기도 한다. 여기서 보니 허공과 그 여자는 무척 가까워 보인다, 그 여자의 일생이 달려와 거기 담요 옆에 펄럭인다, 그 여자가 웃는다, 그 여자의 웃음 이 허공을 건너 햇빛을 건너 빨래통에 담겨 있는 우리의 살에 스며든다…… '<필자의 시 '빨래너는 여자' 중에서>

아마 그래서 오래된 '길'이라는 영화에선 마지막 장면을 빨래너는 장면으로 했는가 싶다. 그리고 그렇다면 빗토리오 데시카라는 감독, 참 괜찮다는 생각이 든다. 빨래와 삶의 비밀스런 얼룩, 하얗게 마르는 그 순수를 잘 보아낸 감독이니 말이다.

아무튼 오늘 바삭바삭 부서지는 햇볕 아래 빨래를 널고 싶다. 내 삶의 얼룩을 햇볕에 말리고 싶다. 얼룩이 모두 사라져 '깨끗한 햇빛마음'으로 돌아가는 그 순간을 보고 싶다.

/강은교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