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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시 거장 정지용의 '고향'
1933년 채동선 곡으로 가곡 만들어
훗날 박화목의 시 '망향'과 결합
이은상 가사 '그리워'로 불리기도
가곡 하나에 세편의 시 '진풍경'
우리 분단사 내재된 희귀한 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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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호 문학평론가·한양대 국문과 교수
정지용은 한국 근대시의 거장이다. 그는 시의 언어 예술적 측면을 자각한 최초의 시인이었고, 시 안에 근대적 삶의 경험적 충실성을 줄곧 표현하였고 투명한 감각과 동양적 정신을 결합하여 시를 씀으로써, 우리 학계에서 가장 풍요로운 해석 문서군(群)을 거느린 시인이 되었다. 그의 시편 중에 대중의 뇌리에 뚜렷하게 남은 것은 일찍이 가곡으로 만들어져 불린 '고향'일 것이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산꽁이 알을 품고/뻐꾸기 제철에 울건만//마음은 제고향 진히지 않고/머언 항구로 떠도는 구름//오늘도 메끝에 홀로 오르니/힌점 꽃이 인정스레 웃고//어린 시절에 불던 풀피리 소리 아니나고/메마른 입술에 쓰디 쓰다.//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그리던 하늘만이 높푸르구나. ― 정지용, '고향'

또 다른 대표작 '향수'에서 정지용은 연마다 반복되는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라는 구절을 통해, 독자들을 고향으로 불러들이는 주술적 효과를 자아낸 바 있다. 우리는 이 작품을 통해 가난이 지닌 질박한 아름다움 속에서 귀속의 안도감을 발견하고 행복감마저 느끼게 된다. 이러한 '향수'와 전혀 다른 지점에서 씌어진 작품이 '고향'이다. 이 시편은 깊은 고향 상실감을 노래하였는데, 여기서 시인은 "머언 항구로 떠도는 구름"이 되어 고향 주변을 겉돌고 있다. 폐쇄된 내면 공간과 열린 자연 공간의 대립이 긴장을 이루면서, 이 작품은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산뜻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 작품은 채동선이 작곡하여 일제강점기 때 널리 불렸다. 채동선은 1910년 전남 보성에서 태어나 3·1운동 후 일본으로 건너갔으며 와세다대 영문과를 졸업하였다. 1918년경에는 홍난파에게 바이올린을 배웠고, 1924년에는 본격 음악 공부를 위해 독일로 유학하여 작곡과 바이올린 연주를 배운 엘리트 중의 엘리트였다. 1929년에 귀국한 그는 바이올린 독주회를 여러 차례 개최하였고, 최호영, 이혜구와 현악 4중주단을 결성하는 등 활발한 음악 활동을 펼쳤다. 전통 음악에도 관심을 보여 '서울 아리랑'등을 편곡하기도 했는데, 1953년 아깝게 타계하였다.

채동선 곡으로 1933년에 태어난 가곡 '고향'은, 당대 우리 나라 지식인들 사이에 최고의 인기곡이었다. 그런데 이 곡은 정지용이 월북시인이라는 이유로 노랫말이 대체되는 역사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정지용이라는 이름을 밝히기 꺼려했던 시대를 반영하듯이, 나중에 박화목이 '망향'이라는 시편을 지어 채동선 곡과 결합하게 되었고, 또 채동선 유족 쪽에서 이은상에게 가사를 의뢰하여 다른 노랫말로 불리기도 하였다.

꽃 피는 봄 사월 돌아오면/이 마음은 푸른 산 저 넘어/그 어느 산모퉁 길에/어여쁜 님 날 기다리는 듯/철 따라 핀 진달래 산을 덮고/머언 부엉이 울음 끊이잖는/나의 옛 고향은 그 어디런가/나의 사랑은 그 어디멘가/날 사랑한다고 말해주렴아/그대여 내 맘 속에 사는 이 그대여/그대가 있길래 봄도 있고/아득한 고향도 정들 것일레라 - 박화목, '망향'

그리워 그리워 찾아와도/그리운 옛님은 아니 뵈네/들국화 애처롭고/갈꽃만 바람에 날리고/마음은 어디고 붙일 곳 없어/먼 하늘만 바라본다네/눈물도 웃음도 흘러간 세월/부질없이 헤아리지 말자/그대 가슴엔 내가/내 가슴엔 그대 있어/그것만 지니고 가자꾸나/그리워 그리워 찾아와서/진종일 언덕길을 헤매다 가네 - 이은상, '그리워'

이처럼 채동선 곡 하나에 시가 무려 세 편이나 따라붙는 진풍경이 벌어진 것이다. 가곡 한 편에 우리 분단사가 내재되어 있는 퍽 희귀한 사례일 것이다. 예술도 역사의 흐름에 빚지고 있다는 분명한 사례로 기억될 만하다.

/유성호 문학평론가·한양대 국문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