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헌부는 오늘날 검찰과 같은 기능을 하는 기관으로 '경국대전'에 시정(時政)을 논집(論執)하고, 백관을 규찰하고, 풍속을 바로잡고, 원억(寃抑)을 풀어주고, 유언비어 날조를 금하는 등의 일을 맡는다고 되어 있다. 이러한 직무에 따라 조정의 모든 관리의 비위 사실에 대한 탄핵감찰권과 일반범죄에 대한 검찰권을 아울러 행사할 수 있는 동시에 불복공소(不服控訴)에 대한 고등법원으로서의 구실까지 겸하는 등 국왕의 뜻을 받아 법률을 집행하는 법사(法司)로서의 기능을 갖고 있었다. 거기에 더해 인사(人事)와 법률개편의 동의 및 거부권 등 국정 전반에 걸쳐 힘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다.
이처럼 중요한 기관이었기 때문에 사헌부의 관원 임명은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는 강직한 젊은 엘리트들을 임명하였다. 특히 장령은 오늘날 검찰의 핵심인 대검찰청 부장검사에 해당하는 지위로 사헌부의 핵심 관료였다. 그래서 사헌부 장령이 조정의 회의에 참여하여 엄숙한 얼굴을 하고 있으면 대소신료들 모두가 떨었다고 할 정도였다.
사헌부 장령으로 임명된 김호는 국왕 숙종의 국정운영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였다. 장희빈을 총애하다 못해 그녀의 오빠인 장희재와 그의 측근들이 권력의 중심이 되어 국정을 농단하는 것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 그는 장령으로 임명된 지 7년 뒤인 1694년(숙종 20) 10월에 숙종에게 장희빈과 장희재 등의 권력농단에 대한 상소를 올렸고, 국왕 숙종의 무능한 국정 수행능력에 대해서도 날카로운 비판을 하였다. 이로써 조정의 대신들은 김호를 사헌부 관원중 최고의 인물로 평가하였다.
이와 같은 목숨을 걸고 파격적인 상소를 올린 김호를 장희재와 가까운 이조판서 유상운이 아주 못마땅하게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를 외직의 수령으로 보내 조정에서 간쟁을 하지 못하게 하였다. 유상운은 인사권을 갖고 있는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김호를 두 달 뒤인 12월에 전염병이 발생하여 수령으로 가면 죽을 수도 있는 울산군수로 발령을 냈다. 그러자 이건명을 비롯한 조정의 신료들이 반발을 하자 이건명을 함경도 병마절도사의 막료인 북평사로 발령을 내어 조정에 남아 있는 것을 원천적으로 막아버렸다. 상당수의 조정의 신료들도 함께 항의하였으나 유상운은 강행하고 말았다. 평소 몸이 병약했던 김호는 울산군수로 임명되어 온 정성을 다하다 3개월 만에 관아에서 사무를 보던중 44살의 나이에 죽고 말았다. 조선시대 가장 강직한 사헌부 장령이 멀고도 먼 바닷가의 고을에서 의도된 타살을 당한 것이다.
최근 우리는 조선시대 사헌부와 같은 검찰의 검사들에 대한 뉴스를 자주 듣는다. 국민을 위해서 일하는 검사가 아닌 자신들의 지위를 이용하여 부정부패를 일삼는 검사들의 이야기이다. 특히 전 국회의장의 사위인 김형준 부장검사의 파렴치한 행위는 국민들에게 분노를 넘어 좌절을 주고 있다. 우리가 사헌부 장령인 김호 같은 강직한 검사를 바라지 않더라도 최소한의 양심을 가진 검사가 우리 검찰에 있기를 바랄 뿐이다. 이것이 희망이라면 대한민국은 희망이 없는 나라다.
/김준혁 한신대 정조교양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