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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미도 원주민 귀향대책위원회 주최로 11일 인천 월미공원에서 진행된 '인천상륙작전 월미도 민간인 희생 위령제'에서 참석자들이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고 있다. /조재현기자

인천 월미도에 첫 폭격이 시작된 건 1950년 9월 10일 새벽이었다. 전투기 14대가 요란스럽게 지붕 위로 날아와 마을을 초토화 시켰다.

마을 위쪽에 살던 주민들은 산 위로, 아래쪽에 살던 사람들은 대한제분 공장 인근 마을로 몸을 피했다. 더러는 갯벌로 달려갔고, 일부 주민들은 빈집이나 빈 공장으로 뛰어 들어갔다.

당시 10살이었던 유청시(76)씨는 가족들과 함께 대한제분 인근 한 얼음 공장으로 몸을 피했다. 십 수일 간 그곳에서 폭격이 끝나기를 기다렸던 때가 아직도 생생하다.

유 씨는 "낮에 나갔다가는 총을 맞을 까봐 밤이 돼서야 곡식을 주워 먹으러 나갔다"며 "깊숙이 들어가지는 못했지만 많은 사람이 모여 전쟁이 끝나기만을 오매불망 기다렸다"고 말했다.

유 씨네 가족은 다행히 이 얼음 공장 덕에 목숨은 건졌지만 오손도손 살던 고향과 집터를 몽땅 잃었다. '고향 땅 한 번 다시 밟아보는 것'이 소원이었던 유 씨의 부모님과 형제들은 고향을 보지도 못한 채 숨을 거뒀다. 유 씨는 가족들의 한(恨)을 풀고자 월미도 원주민 귀향 대책위원회 부위원장으로 활동하며 민간인 희생자와 유족들의 피해 보상의 길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2008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월미도 미군 폭격사건'을 인천상륙작전의 하나로 월미도 주민 100여 명이 사전 경고 없이 무참히 폭격을 당한 일로 규명했다. 작전 이후 마을이 미군기지로, 국방부 땅으로, 또 인천시 공원으로 바뀌는 동안 주민들의 귀향 문제는 한 차례도 고려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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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한국전쟁 당시 폭격으로 벌거숭이가 된 월미도. /경인일보DB=인천시 제공

11일 오전 11시께 월미공원에서 진행된 '제 10회 인천상륙작전 민간인 희생자 위령제'는 어느 때보다 침체 된 분위기였다.

영화 인천상륙작전 개봉으로 많은 사람들은 여느 때보다 '승전' 이야기에 관심을 더 기울이고, 전승기념 행사는 '축제'라는 이름으로 규모가 커졌다.

이들에 대한 보상 내용이 담긴 특별법은 19대 국회 임기 만료로 자동 폐기됐고, 이를 발의한 문병호 전 국회의원은 낙선했다. 인천시와 국방부가 이 문제 해결에 책임을 떠넘기는 동안 생존자들의 위령제 참석은 해마다 줄고 있다.

월미도 원주민 귀향 대책위원회 한인덕 위원장은 "박근혜 대통령이 최근에 월미공원을 방문하면서 민간인 희생자들의 플래카드가 붙은 정문이 아닌 서문으로 들어오면서 전쟁 당시 살아남은 '평화의 나무'만 보고 갔다"며 "우리가 나무 만큼도 못한 존재로 잊히는 것 같아 가슴이 찢어졌다"고 말했다.

한 위원장은 이어 "단지 고향을 잃은 민간인들이 사람 대접을 받는 게 그렇게 어려운 것인가"라며 "지금이라도 인천시가 적극 나서서 민간 희생자들의 보상 대책에 앞장서길 바란다"며 눈물로 호소했다.

/윤설아기자 say@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