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 식솔두고 귀국 작물 연구 매진
우리 토질에 맞는쌀·20여종 품종개량
온갖 곡식들이 익어가는 가을입니다. 올해도 수원시 권선구 서둔동 국립식량과학원 작물시험장의 들녘에는 여러 종류의 벼들이 가을바람을 맞으며 익어갑니다. 이곳 농촌진흥청, 풍성한 들판이 내려다보이는 여기산 자락에 잠들어 계시는 농학자 한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바로 우리나라에 육종학(育種學, 우수한 품종의 생물을 길러내는 기술을 개발하는 학문)의 씨앗을 뿌린 우장춘 박사입니다.
일제 강점기 조선은 철저하게 일본에 예속된 '농업 식민지'였습니다. 일본에서 종자를 들여와 일본식 기술로 농사를 지어왔어요. 그런데 1945년 일본이 패망한 뒤로는 우리 스스로 농업기술을 발전시켜야 했는데 쉬운 게 아니었습니다. 일제는 한국인에게는 모든 분야에서 전문적인 지식과 기술을 가르쳐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가장 기초적인 식량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전문가가 없었어요. 식량 자급자족이 안 되는 신생국 대한민국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량종자를 개발하는 것이었어요. 식량 작물은 인공적으로 종자를 개발해야 생산성이 높아지고 사람들을 먹여 살릴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뜻있는 지도자들이 모여 일본에 있는 세계적인 육종학자 우장춘 박사를 모셔오기로 하고 '우장춘 박사 귀국 운동'을 벌이게 됩니다.
'스나가 나가하루(須永長春)'라는 일본식 이름도 있었던 우장춘 박사는 자신의 업적을 남기는 논문과 공문 기록에는 고집스럽게 자신의 한국 이름을 썼어요. 그래서 그분이 우리나라 사람으로 세계적인 육종학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1950년 3월 우장춘 박사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었음에도 자신의 의지대로 어머니와 부인 그리고 2남 4녀의 자녀를 일본에 남겨놓은 채 홀로 부산항으로 귀국했습니다. 그리고 초대 한국농업과학연구소장을 맡아 식량 작물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부산으로 귀국 후 우장춘 박사는 우리나라 농업발전의 기초를 닦게 됩니다. 6·25전쟁 직후여서 연구 환경은 열악했지만, 우장춘 박사와 함께한 여러 연구원의 노력은 많은 성과를 냈어요. 벼, 감자, 감귤, 배추, 무, 고추, 오이, 양배추, 양파, 토마토, 수박, 참외 등 20여 종류의 품종 개량에 성공했습니다.
특히, 우장춘 박사는 쌀을 우리 토질에 맞도록 개량했고, 많은 과일 품종들을 수입해 대량 생산이 가능하도록 정착시켰으며, 생명력이 강한 꽃씨들을 개발했습니다.
또 우리가 지금 맛있게 먹는 배추와 무, 제주도 감귤, 강원도 감자를 우리 자연환경에 맞게 개량해 보급했습니다. 당시 농업 기술의 발전에는 우장춘 박사의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그러나 1959년 8월 11일 우장춘 박사는 안타깝게도 십이지장 궤양으로 갑자기 숨을 거뒀습니다. 1950년 귀국 후 9년 5개월 동안의 그의 업적을 기려 정부는 문화포장을 수여했고, 수원 여기산에 안장했습니다. 우리는 그분을 오래도록 영원히 기억해야 합니다. 그는 조국의 대지에 희망의 씨앗을 뿌린 '뜨거운 가슴'을 가진 진정한 애국자였습니다.
/김찬수 동원고 교사
※위 우리고장 역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