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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훈(1942~)

맨 앞에 아버지가 가고 나는 아버지 뒤를 따라가고 오리는 내 뒤를 따라오고 모처럼 산길에서 만나 함께 길을 가지만 도시락도 들고 가지만 아무도 말이 없다 아버지는 옛날에도 말씀이 없으셨다 나도 아버지 닮아 말이 없고 오리도 말이 없다 가을 산길  

 

이승훈(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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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성훈 (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
길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는 인생은 어디서 출발했는가? 길에서 만나고 길에서 이별하며 길에서 길을 물으면서 살아가는, 당신은 문을 열고 나가는 순간 통하는 길을 통해 인생이라는 길에서 길로 나아가며 다시 그 길로 돌아온다. 그러나 이 길의 주체는 당신이지만 길을 있게 한 것은 아버지이므로 "아버지가 가고 나는 아버지 뒤를 따라가"는 피동적 주체일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뒤뚱거리는 '오리'가 '맨 앞에' 닮아 있는 오리를 따라가는 것과 같다. 이 같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이 놓여 진 길들이 있지만 이러한 길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와 같이 유사하지만 다르며, 다르지만 연결되어 있다. 아버지와 같이 말없이 익어가는 '가을 산길'에 서면 '나도 아버지 닮아 말이 없고' 묵묵히 아버지가 된 당신도 가족이라는 무리를 이끄는 한 마리 오리와 같이 아픔을 슬픔이라고 말하지 않고, 그저 아버지가 먼저 간 오르막과 내리막을 걸어갈 뿐이다.

/ 권성훈 (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