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품 아니어도 잘 맞는 편한 옷
작은 꿈으로 시작하는 젊은이들
씨알과 꽃이 맺는 아름다운 계절
'사랑할 수 있는 한 사랑' 하면서
걸어가는 이들에게 행복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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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분도 지났다. 아마 본격적인 가을이 오는 모양이다. 가을이 되면 몇 장쯤 오게 마련인 청첩장, 이번 가을에도 지인으로부터 청첩장이 왔다. 그런데 그 문구가 재미있다. 물론 요즘엔 젊은이답게 개성적인, 두 젊은이가 머리를 맞대고 심사숙고한 끝에 쓴 것이 분명한 청첩의 글이 심심치 않게 보이지만, 모두(冒頭)에 소개한 청첩의 구절은 이 가을에 부는 바람처럼 옷깃을 새삼 여미게 하고 뒤이어 일어서는 많은 생각의 가지를 가을바람에 흔들리게 한다. 과연 결혼이란 뭘까. 이 철없다고만 생각했던, 화려한 아파트만 바라보고 화려한 명품의 옷, 그러한 화려함의 명품 소도구들만 따를 거라고 짐작했던 멋쟁이 젊은이들이 '포근한 집, 편안한 옷'이라는 표현을 쓴 결혼이란…. 흔히 '결혼을 해도 후회할 것이요, 결혼을 안해도 후회할 것'이라는 서양 작가의 말이 금박의 모자를 쓰고 떠도는 이 화려한 세상에서 이렇게 고전적인 그리고 예의 바른, 소박하기까지 한 청첩의 글을 젊은이들이 쓰다니….
결혼이란 어찌 보면 '세상에의 굴복'이다. 그래서 온갖 꿈이 생활 속에 내팽개쳐지기 전에 되도록 화려한 결혼식이란 이벤트를 마련하는 것일 거다. 그 이벤트는 그러니까 속임수의 커튼인지도 모른다. 그 커튼을 걷고 나면 마치 김승옥 작가의 '무진기행'이란 단편에 박힌 구절들처럼 가득 안개가 낀 그런 세월 속으로 떠나는 것일거다. 그래서 그 안갯속으로 떠나가는 아들을 향하여, 또는 딸을 향하여 부모는 눈물을 훔치는 것일 거다. 그렇다. 결혼이란 결혼 전에 꾼 꿈에의 굴복이며 도전에의 굴복이며 지성적 가치에의 굴복이다. 학교에서 배운 것이 아닌 도덕에의 굴복이며 교양만으로는 헤쳐나가기 힘든 굴복이다. 그러나 이 청첩장의 젊은이들은 그런 추상적이기만 한, 또는 관념적이기만 한 환상의 면사포를 그 결혼이란 하늘에 드리우지 않을 뿐 아니라, '포근한 남편, 편안한 아내' 그런 확실하고 낮은 토대를 그들의 꿈의 첫 계단에 싣고 있는 것이다. 거기서부터 그들의 나무를 자라게 하고 있다고나 할까. 그러니까 그들의 결혼은 굴복이 아니라, 금박의 꿈도 아니라, 그들의 작은 꿈의 긍정인 것이다. 모든 기성의 결혼이 부정에 바탕을 둔 것이라면 그들의 결혼은 긍정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다.
나는 젊은 시절 언젠가, 어떤 잡지로부터 한 청탁을 받았던 것을 아직도 씁쓸하게 기억한다. 그 청탁서는 '시적인 남편과 시적인 아내'라는 제목이었다. '부연해서 설명 하자면요…', 하면서 그 청탁을 했던 기자가 좀 계면쩍은 듯이 목소리를 잔뜩 가라앉히고 말하던 것을 기억한다. '시적인 환상이 깨졌을 때 어떻게 하세요? 그런 경험을 중심으로 재미있게 써주시면 돼요… 두 분은 시인이시니까… ' 그 질문은 마치 '깨지지 않을 수 없다'는 전제를 강조하면서 시작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우리는 '…깨지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결혼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그 지점에서 시작하고 있었고, 또 거기서 끝나고 있었다. 그러나 '젊음은 아름다운 환상의 꿈을 꾸는 것이다, 그래서 젊음의 꿈은 난해하다. 그러나 젊은 시절에 꾸는 꿈은 나이가 먹으면 곧 깨질 것이다, 이것은 당연한 세상의 이치다' 라고 말하는 어른들이야말로 '너무 큰 것만 생각하는, 금박의 높은 대문, 또는 우람한 담을 그 무엇보다 다가가야 할 가치라는 생각을 눈부신 실크 커튼으로 가리고 있는 것이 아닐는지. '크지 않아도 포근한 집, 명품이 아니어도 몸에 잘 맞는 편안한 옷'이라는 그런 작고 구체적인 꿈에서부터 우리의 사회를 길러 나가려 하는 젊은이들, 얼마나 건강한가. 이 아름다운 계절, 씨알과 꽃이, 바람과 햇빛이 결혼하는 이 계절, 리스트의 노래제목처럼 '사랑할 수 있는 한 사랑'하면서 걸어가는 이들에게 행복 있으라.
/강은교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