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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혁 한신대 정조교양대학 교수
1790년 4월 29일. 정조가 국방강화를 위해 추진했던 '무예보도통지'가 간행되었다. 조선의 무예를 비롯하여 중국과 일본의 무예를 24가지로 정리한 무예서가 간행된 것이다. 조선이 건국된 후 군영마다 익히는 무예가 달랐고, 무과 시험 역시 표준무예가 없었다. 그래서 정조는 국방 강화의 핵심으로 표준 무예 정립이 그 무엇보다도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정조는 1759년 아버지 사도세자가 18가지 무예를 정리하여 간행한 '무예신보'를 바탕으로 마상무예 6가지를 추가하여 새로운 무예서를 만들어냈다. 이러한 엄청난 성과를 더욱 빛나게 하는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다름 아닌 '무예도보통지'의 훈민정음 언해본을 동시에 간행한 것이다. 백성들이 어려운 한문으로 된 '무예도보통지'를 읽을 수 없기 때문에 백성들이 읽고 무예를 익히게 하도록 언해본을 간행하게 한 것이다.

사실 조선왕조에서 백성들을 위한 다양한 서적의 언해본을 거의 간행하지 않았다.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하였지만 세종이 죽고 난 후 훈민정음은 정음(正音)이 아닌 언문(諺文)으로 천대받기 시작하였다. 세종의 생각과 달리 한문만을 중요시 여기는 양반사대부 등 기득권 세력들에 의해 훈민정음은 철저히 외면받았다. 그들에 의해 훈민정음은 천한 글 혹은 여자들이 사용하는 글이라는 뜻을 가진 '언문'으로 격하되고 활용되지 못했다. 조정에서 훈민정음으로 책을 낸 것이 세종대 용비어천가와 월인천강지곡 그리고 세조 대에 석보상절 등이지 나머지 국왕 대에는 거의 없었다. 양반사대부들이 읽는 경서를 훈민정음으로 번역하거나 아니면 국가의 정책과 법률을 훈민정음으로 번역하여 백성들이 읽고 생각할 수 있게 하는 일도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이와 같이 훈민정음이 천대받던 시절에 국왕 정조는 전혀 다른 생각을 하였다. 백성들이 읽고 쓸 수 있어야 국가가 올바르게 발전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정조는 즉위 후 가난으로 버려진 아이들과 전염병으로 부모가 죽어 고아가 된 아이들을 기르기 위한 '자휼전칙'이란 법을 제정하였다. 이 법대로 하자면 해당 고을의 수령은 고아가 된 아이들이 10살이 될 때까지 반드시 책임지고 관아에서 생활비를 제공하여 살아갈 수 있게 해야 했다. 정조는 이 법의 존재를 백성들이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서 이를 훈민정음으로 번역하여 간행하게 하였다. 정조는 그 후 죄를 지어 관아에서 심문을 받는 죄수들의 인권을 생각하여 가혹한 체벌을 금지하는 '흠휼전칙'이란 법을 제정하였다. 수령이나 관원들이 비록 죄인이라 하더라도 가혹한 매질과 고문을 가하지 못하게 하고, 감옥 안을 반드시 청결하게 유지할 수 있게 만든 법이었다. 이 역시 훈민정음으로 번역하여 반포하였다. 이처럼 정조는 국가의 법률과 정책 그리고 새로운 지식을 제공하는 서적들의 상당수를 훈민정음으로 번역하여 간행하였다. 새로 간행된 언해본 '무예도보통지'를 통해 무예에 자질이 있는 백성들이 표준 무예를 익힐 수 있었고, 무과에 당당히 합격하여 새로운 신진 무반이 될 수 있다. 백성들을 똑똑하게 만드니 자연스럽게 국방도 강화될 수 있었다. 기득권층들이 자신들만 문자를 알고 백성들은 무지하게 하려는 것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일반적이다. 하지만 정조는 그리하지 않았다. 그래서 오늘날 위대한 군주로 평가받는 것이다. 한글날을 지내면서 오늘의 한반도에 있는 두 나라의 지도자와 정조를 생각해보았다. 그저 씁쓸할 따름이다.

/김준혁 한신대 정조교양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