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실 조선왕조에서 백성들을 위한 다양한 서적의 언해본을 거의 간행하지 않았다.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하였지만 세종이 죽고 난 후 훈민정음은 정음(正音)이 아닌 언문(諺文)으로 천대받기 시작하였다. 세종의 생각과 달리 한문만을 중요시 여기는 양반사대부 등 기득권 세력들에 의해 훈민정음은 철저히 외면받았다. 그들에 의해 훈민정음은 천한 글 혹은 여자들이 사용하는 글이라는 뜻을 가진 '언문'으로 격하되고 활용되지 못했다. 조정에서 훈민정음으로 책을 낸 것이 세종대 용비어천가와 월인천강지곡 그리고 세조 대에 석보상절 등이지 나머지 국왕 대에는 거의 없었다. 양반사대부들이 읽는 경서를 훈민정음으로 번역하거나 아니면 국가의 정책과 법률을 훈민정음으로 번역하여 백성들이 읽고 생각할 수 있게 하는 일도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이와 같이 훈민정음이 천대받던 시절에 국왕 정조는 전혀 다른 생각을 하였다. 백성들이 읽고 쓸 수 있어야 국가가 올바르게 발전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정조는 즉위 후 가난으로 버려진 아이들과 전염병으로 부모가 죽어 고아가 된 아이들을 기르기 위한 '자휼전칙'이란 법을 제정하였다. 이 법대로 하자면 해당 고을의 수령은 고아가 된 아이들이 10살이 될 때까지 반드시 책임지고 관아에서 생활비를 제공하여 살아갈 수 있게 해야 했다. 정조는 이 법의 존재를 백성들이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서 이를 훈민정음으로 번역하여 간행하게 하였다. 정조는 그 후 죄를 지어 관아에서 심문을 받는 죄수들의 인권을 생각하여 가혹한 체벌을 금지하는 '흠휼전칙'이란 법을 제정하였다. 수령이나 관원들이 비록 죄인이라 하더라도 가혹한 매질과 고문을 가하지 못하게 하고, 감옥 안을 반드시 청결하게 유지할 수 있게 만든 법이었다. 이 역시 훈민정음으로 번역하여 반포하였다. 이처럼 정조는 국가의 법률과 정책 그리고 새로운 지식을 제공하는 서적들의 상당수를 훈민정음으로 번역하여 간행하였다. 새로 간행된 언해본 '무예도보통지'를 통해 무예에 자질이 있는 백성들이 표준 무예를 익힐 수 있었고, 무과에 당당히 합격하여 새로운 신진 무반이 될 수 있다. 백성들을 똑똑하게 만드니 자연스럽게 국방도 강화될 수 있었다. 기득권층들이 자신들만 문자를 알고 백성들은 무지하게 하려는 것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일반적이다. 하지만 정조는 그리하지 않았다. 그래서 오늘날 위대한 군주로 평가받는 것이다. 한글날을 지내면서 오늘의 한반도에 있는 두 나라의 지도자와 정조를 생각해보았다. 그저 씁쓸할 따름이다.
/김준혁 한신대 정조교양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