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83년 이전 500명 동네서
근대문물 유입 항구도시로
1979년 100만·1992년 200만
면적 165 → 1062㎢ 확대도
인천 중구 일대 '개항장 인천'은 1883년 개항 이전까지 인구 500명 정도의 한갓진 어촌 마을이었다. 한반도 서해연안을 거쳐 중국 산둥반도까지 가는 해상로의 요충지였지만, 농업국가였던 조선은 해상세력을 중시했던 고려 때와 달리 바다 쪽에 눈을 돌리지 않았다. 마치 바다가 인천을 막고 있는 형국이었다. ┃그래픽 참조
외세에 의한 강제 개항 이후 인천은 '근대화된 도시'로 급속하게 변모하면서 주목받게 된다. 근대문물이 들어오는 국제적 항구도시가 됐고, 각국의 조계지, 외교·통상을 담당하는 감리아문(監理衙門), 무역관세를 징수하는 해관(海關), 은행, 병원 등이 속속 들어섰다. 개항장은 서양식 도시계획이 적용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도시이기도 했다.
항만시설과 공업단지를 확보하기 위해 바다가 매립됐고, 인천과 서울을 잇는 철도와 도로가 건설됐다. 이는 인천 시가지를 확산시키는 촉진제 구실을 했다.
1960~70년대 정부의 경제개발계획에 의해 공업지역이 형성됐다. 경인고속도로 개통은 시가지를 동서 방향으로 확장시켰다. 이 시기 인천의 인구는 빠르게 증가했다. 1979년 인천 인구는 100만 명을 돌파한다.

아파트 등 주거시설과 공장시설은 꾸준히 확충됐다. 1980년대엔 연수택지개발지구와 남동공업단지(현 남동인더스파크) 등이, 1990년대엔 계산택지, 삼산택지, 검암구획지구, 검단지역 등이 개발됐다. 1992년 인천의 인구는 200만 명을 넘어선다. 인구 100만 명 돌파 이후 13년 만이다.
1995년 '인천광역시'로 승격되면서 인천은 부지가 더욱 넓어졌다. 경기도에 속했던 강화군과 옹진군, 검단면이 이때 인천에 편입됐다. 1940년대에서 1970년대까지 165㎢ 정도였던 인천의 면적은 공업단지 조성을 위한 매립, 시 외곽지역 편입 등의 영향으로 1995년 954㎢까지 증가했다.
대한민국의 관문 인천국제공항이 영종도에 들어섰고, 송도, 청라 등 경제자유구역은 인천이 비약적 도시 발전을 이룩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들었다. 인천시는 올해 연말 인천의 면적이 1천62㎢가 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인천은 '한양의 목구멍'(근대 이전), '국제적 항구도시'(개항 이후), '쌀의 도시'(1920~1935년), '병참(무기) 도시'(1936~1945), '공단도시'(1970년대), '국제항구도시'(1990년대), '동북아 허브도시'(2000년 이후) 등으로 성격을 달리하며 성장해왔다.
곧 인구 300만 명 시대를 맞게 될 인천의 성장과 진화는 현재진행형이다.
/이현준기자 uplhj@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