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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준 인천본사 정치부 차장
70년 전 발행된 대중일보에선 해방공간 혼란했던 우리 사회의 단면을 읽을 수 있다. 다양한 사상과 사람이 인천이라는 공간에서 뒤엉켰고, 다양한 모습을 만들어갔다.

정치적으로 좌익과 우익의 대립은 심화했다. 인천은 개항으로 일본과 서양의 신문물이 조선에 유입되는 관문이었다. 전국의 지식인과 예술가들이 신문물과 신지식을 찾아 모여든 도시였다. 노동자가 가장 많은 역동적이고 진취적인 도시이기도 했다. 다양한 정치 세력이 형성될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을 갖춘 인천에서 좌익과 우익 진영의 정치 세력이 강하게 부딪친 건 어찌 보면 자연스럽다.

사회적 혼란은 가중됐다. 왜말, 신사 등 일제의 흔적은 쉽사리 지워지지 않았다. 일제에 의해 중국·사할린·남양군도 등 해외로 징용, 징집돼 총알받이로 내몰렸다 살아남은 '전재동포'(戰災同胞)들은 해방 후 맨몸으로 고국에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인천항으로 밀려드는 전재동포 문제로 실업과 주택난 등이 심화됐다. 전재동포 귀환의 통로였던 인천은 이런 상황을 감내해야 했다.

인천은 그들을 외면하지 않았다. 딱한 처지의 전재동포를 돕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코흘리개 초등학생들은 한겨울 거리로 나서 모금 운동을 벌였고, 의사들은 '우리 동포는 우리 손으로 구하여 주는 것이 가장 옳은 일'이라며 치료비를 마다하고 진료를 봤다.

인천은 인천이라는 틀 안에 고립되지 않았다. 해양인재를 키워낼 적지로 국가가 꼽은 곳은 바로 '인천'이었다. 인천은 최초의 국립 해양대학 건설을 위해 강화, 김포, 안성, 수원 등 경기지역 각 주요 도시와 서로의 힘을 합쳤다.

인구 300만 명을 돌파한 2016년 인천의 모습도 그때와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전국 곳곳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다양한 군상을 만들어가고 있고, 현안 해결을 위해 주변 지자체와 힘을 모은다. 외부와 단절된 인천은 생각할 수 없다. 인천은 그때나 지금이나 '열린 도시'다.

인천의 가치를 높이고 주권을 찾아야 한다는 얘기가 인천시 안팎에서 많다. 그러나 이 말이 자칫 인천이 아닌 지역과의 벽을 높여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돼선 안될 일이다.

/이현준 인천본사 정치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