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랑은 하나의 의미로 정의할 수 없는 인간 감정의 집합이자, 숨길 수 없는 인간 본성이건만, 사람들은 점점 사랑을 표현하는 데에 인색해져간다. 각박한 사회가 사랑을 숨기게 한다. 자꾸 사랑의 무게를 저울질해보라 권한다. 남과 여를 나누고 서로 누가 더 피해자인지 겨뤄보라고 부채질한다.
장사꾼처럼 사랑을 흥정하고 저울눈을 속이듯 서로 이득을 노리는 관계에서는 진정한 사랑이 싹트고 열매 맺지 못한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사랑의 시작점은 사랑하는 대상으로부터가 아니라 나로부터라는 점이다. 내가 먼저 사랑해야, 내가 먼저 표현해야 사랑은, 더 사랑스러워진다.
어느 저명한 목사와 그의 아들에 얽힌 이야기가 있다. 목사의 아들은 중학교에 다니는데 얼굴도 잘생겼고 공부도 곧잘해서 누구에게나 귀여움을 받았지만 한 가지 약점이 있었다.
나면서부터 눈이 사팔뜨기였던 것이다. 하루는 그 아이의 담임선생이 학교로 한번 찾아오라고 했다. 무슨 일일까 하고 급히 학교에 달려갔더니 담임선생은 별일은 아니라고 하면서 그의 아들이 나무랄 데 없는 훌륭한 아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담임선생은 이내 송구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런데 목사님, 저 아이가 모든 일에 모범적이고 꿀릴 데가 하나도 없는데 한 반의 친구란 놈들이 보기만 하면 '사팔뜨기' 라고 해서 학교에서는 기가 죽어 있는 것 같다"는 말이었다.
그 말을 들은 목사는 말했다. "아니 사팔뜨기를 사팔뜨기라고 부르는 게 무슨 잘못입니까? 그것 때문에 기가 죽을 까닭은 하나도 없지요." 이렇게 말하고 오히려 얼굴에 미소를 지으면서 그는 교무실을 나왔다.
사실 목사는 그날 밤 한잠도 못 자고 뜬눈으로 새웠다고 한다. 자기의 아들이 친구들에게 사팔뜨기라고 놀림을 받는다고 생각을 하니 마음이 괴로워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른 새벽부터 아무도 없는 예배당에 홀로 무릎을 꿇고 앉아서 "제 아들의 눈을 내 눈과 바꾸어 주었으면" 하는 기도를 했다고 한다.
사랑은 주는 것이지 받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 있다. 받을 것을 기대하고 보내는 사랑은 이미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어찌할 수 없는 마음에서 하는 것이지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있는 것 중의 하나를 택하는 일은 결코 아니다.
남녀 간의 사랑이 됐건, 부모 자식 간의 사랑이 됐건 또 친구 동료 간의 우정이 됐건 쉽사리 진실한 사랑을 찾아보기 어려운 세상이 된 것만은 부인할 수 없다. 사랑이 욕심과 질투로 얼룩져 변질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자기 뜻대로 안 되면 끝까지 괴롭히고 상해라도 입히고야 말리라고 악을 쓰는 사람들도 적지 않으니 안타깝기 그지없다.
베풀고 또 베푸는 사랑, 되돌려 받을 것을 기대하지 않고 오직 주기만 하는 그런 사랑이 그리운 세상이다. 주고 또 주어서 결국은 그 품에 하나로 녹아드는 바로 그런 사랑이 아쉬운 세상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모습의 사랑을 관통하는 단 한 가지는 상대를 위해 내 마음 한구석을 비워두고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상대가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따뜻해지고 행복해질 수 있다면 그것이 진정한 사랑의 모습이 아닐까?
내가 이 세상의 중심이고, 사랑은 쟁취하고 소유하는 것으로만 이해하고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에게 상대를 배려하고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라는 얘기는 고리타분할 수도 있다. 하지만 경쟁과 약육강식만 횡행하는 일상에서 사랑마저도 없다면 우리는 과연 무엇에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겠는가.
/남길우 경기도 예산정책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