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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버 스톤은 할리우드에서 보기 드물게 정치·역사·문화에 관심이 많은 감독이다. 그는 1987년 데뷔작 '플래툰'에선 월남전의 허구를, 그리고 10년후 '닉슨'에선 미 정치사에 가장 큰 문제의 인물 중 한명이었던 37대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내면을 들여다 보고 싶어 했다. 신들린 것처럼 뛰어난 연기로 닉슨 역을 완벽하게 소화해 낸 안소니 홉킨스의 열연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워터게이트사건'으로 언론의 집요한 추적에 더 이상 설 곳이 없었던 닉슨. 마침내 사임을 결심하고 백악관 복도를 걸어가며 보좌관에게 이렇게 말한다. "난 규칙을 따랐지만, 게임 도중에 규칙이 바뀌었지. 이젠 누구도 미국의 제도를 존경하지 않아." 그리고 사임 전날, 백악관 복도에 걸려있는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사진 앞에서 "사람들은 케네디에게서 자신의 이상형을 보고, 나에게선 자신의 실제 모습을 보려고 해"라고 읊조리던 장면은, 분노와 고뇌에 찬 닉슨의 모습을 훌륭하게 그려낸 명장면이다.

프랑스 '68혁명'으로 불리는 1968년 5월 학생시위의 주목적은 베트남전쟁 반대였다. 낭트 대학에서 시작된 시위는 프랑스 전역으로 번졌으며 1천만명의 노동자들이 가담했다. 시위도중 4명이 사망했다. 이는 샤를 드골의 퇴진으로 이어졌다. 1969년 4월28일 0시10분 발표된 드골의 하야 성명은 너무도 간결했다. "나는 프랑스공화국 대통령으로서의 직능 행사를 중지한다. 이 결정은 정오부터 발효한다." 2차대전의 영웅, '위대한 프랑스'라는 기치아래 10년 이상 권좌를 지켜온 거물 정치인, 그의 전격적인 사임에 전 세계는 충격을 받았다. 드골은 국민투표를 좋아한 대통령이었다. 위기때마다 내놓는 것이 국민투표였다. 68혁명이 들불처럼 번지자 드골은 '상원 개혁과 행정체제 개편'을 명분으로 국민투표에 부쳤다. 하지만 패했고 그는 깨끗하게 물러났다.

역사는 분노한 국민만 기록할 뿐, 고뇌에 찬 대통령까지 그려낼 만큼 여유롭지 못하다. 그건 영화의 몫이다. 지금 박 대통령의 상황은 도도한 '68혁명'의 시위 함성에 묻혔던 드골보다,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언론으로부터 모진 공격을 받던 닉슨보다 더 절망적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과연 깊은 회한 속에서 힘겨운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을까. 어떤 결론이 나건 이제 운명의 시간이 조금씩 조금씩 다가오고 있다.

/이영재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