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터지는 의혹 국민들 허탈
대권 잠룡들 혼란 정국 수습보다
부산하게 주판알 튕기는 소리만
거리에 나선 민심 등에 업고
권력 잡으려는 정치인 주변 가득
국민들 지혜롭지만 냉철하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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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재 논설실장
세살짜리 아이가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내일이 언제야?" 엄마가 말했다. "하룻밤만 자고 나면 내일 이란다"

다음날, 아이는 눈을 뜨자마자 엄마에게 달려갔다."엄마, 오늘이 내일이야?" 엄마는 "아니 얘가 요즘 왜 이러지?"라며 약간 귀찮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은 오늘이고, 내일은 오늘 밤이 지나야 하는 거야. 그리고 그 다음날은 모레, 그 다음날은 글피…."

다음날 아침, 아이는 또 엄마에게 달려갔다. "엄마! 엄마! 오늘이 진짜 내일이지?" 엄마는 이제 더 참을 수 없다는듯이 "아니, 없어! 내일은 없어, 없다구!"라고 소리쳤다.

이 말을 들은 아이는 천연덕스럽게 중얼거렸다. "아! 내일은 없는거로구나. 우리에게 내일은 없었어." 그러면서 밖으로 뛰어나간 아이는 놀이터에서 모여 놀고 있는 친구들에게 소리쳤다. "얘들아! 엄마가 그러는데 우리에겐 내일은 없대. 그러니 오늘 실컷 놀자!"

웃자고 한 얘기다. 너무 답답해서 말이다. 토요일 광화문을 가득 메운 촛불을 보고 있노라니 한숨만 나온다. 그곳에 있던 시위대의 함성에는 박근혜 대통령의 퇴진없인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는 말이 섞여 들리는 것 같았다. 이런 분위기라면 정말 내일은 없을 것 같다. 한국사에 제법 굵직한 사건을 모두 겪었던, 50·60대들에게도 이번 사태가 큰 충격이었는데 '헬조선'이 몸에 밴 청춘들의 충격은 더 컸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어려울 때일수록 우리 국민들은 이를 잘 수습하곤 했다. 10·26도 그렇고 5·18도, 6·10도 그리고 IMF가 터졌던 그날도, 마치 그때 세상이 모두 끝나는 줄 알지만 그렇지 않았다. 그 잘난 정치인들 때문이 아니다. 우리 국민들이 현명해서다. 무너질 것 같으면서도 다시 일어나는 그 '유연함' 그게 우리 국민의 저력이다. 위기 때마다 우리 국민은 늘 그랬다.

1979년 10월27일 아침. 날씨가 제법 쌀쌀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거리에는 온통 신문지가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 有故'라는 제목의 호외였다. '유고'라는 생판 처음 본 단어. 사전적 의미는 '특별한 사정이나 사고가 있음'이지만 이 또한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었다. 지나가는 어른이 얘기해 줘서 알게 됐다. 장기집권하던 대통령에게 무슨 일이 생겼으며, 호외까지 발행했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한다는 것. 박 대통령의 죽음은 충격이었지만 우리는 잘 극복했다.

박근혜 대통령을 지지했건, 그렇지 않건 매일 터져 나오는 의혹 때문에 국민들은 배신감과 허탈감, 무력감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5%라는 지지율은 여론 조사기법의 신뢰성을 차치하고라도, 이는 박 대통령에게는 사망선고나 다름없다. 대통령 지지율이 떨어지면 정치권의 목소리가 늘 커지는 법이다. 그래서 정치권이 요동을 친다. 이번도 예외는 아니다. 혼란한 정국을 수습하기 보다, '대권'을 잡기 위해 잠룡들이 부산하게 주판알을 튕기는 소리로 요란하다.

세상사 별일 다 겪은 50·60대는 정치인들의 '말'과 '행동'을 그리 크게 믿지 않는 편이다. 어렵게 얻어냈던 '80년의 봄'을 정권욕에 불타는 3金 때문에 군인들에게 그냥 내준 꼴이 됐다. 6·29는 정치인이 얻어 낸 성취물이 아니라 국민의 손으로 쟁취한 민주화였다. 그럼에도 전두환의 연장선에 있던 노태우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건, 또다시 두 명의 金씨가 단일화를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다. IMF때도 고사리 같은 국민의 손가락에서 빼낸 금반지가 나라를 구했지, 그때 정치인들은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했다. 이번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정국 안정 보다 이 어수선한 분위기를 더 끌고 가고 싶을 것이다. 벌써 그런 전조(前兆)가 보인다. 거리에 나선 민심을 등에 업고 권력을 잡으려는 정치인만 주변에 가득하다. 민심은 내 편이며 차기 정권은 따놓은 당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하지만 국민은 냉철하다. 여권의 지지율이 폭락해도 야권의 지지율이 정체를 보이는 것은 큰 의미를 갖는다. 정치인이 아니어도 내일의 태양은 또 떠오른다. 세 살짜리 꼬마가 내일이 없다고 소리쳐도, 내일은 소리 없이 왔으니까. 어수선한 난국을 스스로 헤치고 극복해 나가는 우리 국민의 지혜를, 나는 믿는다.

/이영재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