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만명 동시대 삶의 공간 1926년 파리와 똑같아
정체·가치·지향성에 대한 물음 인천도 존재하는가
숫자에 미혹돼 소중하고 필요한것 빠뜨렸는지 불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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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충환 인천 시청자미디어센터장
화가 나혜석에게 파리는 충격이었다. 2년 가까운 유럽여행을 마치고 귀국한 뒤 5년이 지나서 쓴 글에서도 여진은 계속되고 있다. 1934년 잡지 '삼천리(三千里)'에 실은 글이다. "별과 같이 길이 뻗쳐났다. 그리고 건물이 삼각형으로 되어 자못 아름답다. <중략> 어디를 가든지 도로 좌우편에는 병목(병木)이 있고 중앙은 차마도(車馬道)로 목침만큼 한 나무로 모양 있게 깔고 좌우에 인도가 있고 거기에는 매 칸에 하나씩 수도가 있어 아침마다 물을 뽑아 길을 씻어내려 유리같이 되어 있다."

그녀가 본 파리는 '파리 개조 사업'의 결과물이다. 1853년 이전만 해도 파리의 좁은 길들은 미로처럼 얽혀있었다. 길 위로 시궁창물이 넘쳤다. 전염병이 창궐했다. 나폴레옹 3세는 황제로 즉위하자마자 오스만 남작을 지사로 임명했다. 그에게 도시구조 개혁을 지시했다. 중세도시 잔재 그대로였던 파리가 근대도시로 변모한 것은 이때부터다. 오스만은 1870년 지사에서 물러날 때까지 대대적인 개조사업을 통해 파리의 골격과 외양을 모조리 바꿔놓았다. 나혜석이 본 청회색 아연 지붕과 베이지색 벽면의 건물들이 즐비한 '빛의 도시' 파리는 그로부터 50년이 지난 뒤의 모습이다. 이때의 파리 인구가 300만 명에 육박한다. 1926년 기준 287만1천명. 외국인 체류자를 제외한 오늘의 인천 인구와 같다.

빛의 반대편에 그림자가 있었다. 그림자는 특히 도시빈민들 머리 위로 길게 드리워졌다. 20년에 걸쳐 파리가 뜯어고쳐지는 동안 그들은 공사판 소음과 먼지 속을 전전해야만 했다. 이후 몇 십 년이 지나도록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아무도 그들의 주거환경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오직 한 사람,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를 제외하고.

현대의 모든 도시는 그에게 빚을 지고 있다고 할 만큼 르 코르뷔지에는 도시의 미래를 내다봤던 건축혁명가다. 그는 산업혁명으로 인해 도시로 몰려든 저임금 하층노동자와 도시빈민을 염두에 둔 '300만 거주자를 위한 현대도시 계획안'과 이를 파리에 접목시킨 '파리 부아쟁 계획'을 잇따라 제안했다. 도심에는 강철로 뼈대를 만든 60층 상업용 초고층건물들이 십자 모양으로 늘어서고, 그 주변으로 60만 명이 거주할 수 있는 빌라형 공공주택이 들어선다. 외곽에는 250만 명이 살 수 있는 전원도시를 배치했다. 오늘날 흔히 볼 수 있는 전 세계 메트로폴리스(metropolis)의 모습이다. 그러나 기득권은 집을 기계로 보는 미치광이라고 그를 비난했다. 극우파는 레닌의 앞잡이로, 극좌파는 프랑스 자본주의의 앞잡이로 몰아세웠다. 그러자 르 코르뷔지에가 되묻는다. "파리는 무엇인가?" "파리의 아름다움은 무엇인가?" "파리의 정신은 무엇인가?"

인천의 인구가 마침 1920년대 중반 파리의 그것과 같다. 가진 사람과 가지지 못한 사람, 전통을 지키려는 사람과 혁신을 도모하는 사람, 배척하려는 사람과 공존하려는 사람, 그리고 무엇보다도, 행복한 사람과 행복하지 않은 사람 300만 명이 함께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공간이라는 점에서 1926년의 파리와 똑같다. 그때 그곳에서는 파리의 정체성(正體性)에 대한 질문이 있었다. 파리의 가치성(價値性)에 대한 질문이 있었다. 파리의 지향성(志向性)에 대한 질문이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 인천에서도 그런 질문들이 존재하는가. "인천은 무엇인가?" "인천의 아름다움은 무엇인가?" "인천의 정신은 무엇인가?"

'3,000,000'이라는 숫자에 미혹돼 꼭 물어봐야 할 것을 빠뜨린 채 지나가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스럽다. 진짜 소중하고 진짜 필요한 것들이 숫자놀음에 매몰되고 있는 건 아닌지 불안하기도 하다. 르 코르뷔지에의 시선은 '도시'가 아니라 그 도시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을 향했다. 그걸 보지 못한 나혜석은 너무 낭만적이었고, 그걸 질문하지 못하는 우리는 너무 게으르다.

/이충환 인천 시청자미디어센터장